Embrace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
Embrace
잊히고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우수라면, 그 우수에 찬 눈을 가진 사람의 뒷모습은 겨울이다. 어느덧 인생의 가을에 서 있는 나는 앙상한 뒷모습만 남게 될까 두려워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한참을 젖은 눈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앞에서 뒤로 흐르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아득한 저 아래에 쌓이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어떻게 무게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오랜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눈을 감으면 나는 11월 말의 어느 날, 얼어버린 낙엽이 뒹구는 횡단보도 위에 홀로 서 있다. 진눈깨비는 점차 눈으로 바뀌고 있었고, 그에 따라 대기도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웅크리고 있던 나는 잠시 봄을 느낄 수 있었다. 신호를 일곱 번 넘길 무렵 바닥엔 조금씩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하는 데엔 몇 분 채 걸리지 않았다.
몇 초간 섬망에 빠진 듯한 상태로 나는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여 그 길 위에 멈춰 서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시간이었고, 바닥에 쌓인 눈도 누적된 시간으로 보였다. 눈이 내린다고 해서 항상 쌓이지는 않듯,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도 동시에 떠올랐다.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사무칠 정도로 강렬한 갈망이 내 안에서 일었다. 흘려보낸 시간이 사라지지 않고 쌓이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흔적이 남는 삶, 기억에 남는 삶을 살고 싶다는 절박한 소망이었다.
여기, 인생의 절반을 허투루 살아버린 한 미련한 사람이 있다. 그는 추워지는 길목에 서서 두꺼운 옷깃을 여민 채 위에서 떨어지는 시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깊은 우물을 들여다본 그는 소스라친다. 그가 남들보다 앞서 가고 남들보다 빨리 가려고 온 힘을 다하던 시절들에 이르자 그 무게가 깃털보다 가볍다는 뜻밖의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 같던 시간들이었건만 파리한 나뭇가지 같은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잊히고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다. 허망함에 가득 찬 그의 눈은 다행히 분노가 아닌 우수에 차 있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겨울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가올 시간을 올려다보며 앞으로도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음을 예감한다. 그리고 마침내 뒤돌아서서 자신의 뒷모습을 끌어안는다. 겨울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인 그는 이제 모든 계절을, 모든 순간들을 끌어안을 기세다. 비록 앞으로 다가올 많은 시간들이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가더라도 그 순간들을 치열하게 사랑하리라고 다짐한다. 기억에 남지 않게 될 삶조차도 두 팔 벌려 끌어안기로 한다.
나는 가을, 그중에서도 늦가을을 사랑한다. 11월이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 절박한 마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관조하며 우수에 찰 수 있다는 건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허망해하던 내 모습도, 심지어 분노하던 내 모습도 모두 다 나라는 진실을 이제 나는 겸허히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