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우울의 터널을 지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속도는 저만 빼고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고, 저는 마치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진 음식처럼 쓸모없게만 느껴졌죠.
그날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동네 시장 골목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과일 가게 앞, 발갛게 익은 사과들 사이에 유독 초록빛이 강한 사과 하나가 눈에 띄더군요. 혼잣말로 나지막이 내뱉었습니다.
"이건 아직 멀었네, 못 먹겠다."
제 자조 섞인 혼잣말을 들으신 걸까요. 좌판을 정리하던 주인 할머니가 허리를 펴며 툭, 한마디를 던지셨습니다.
"아이고, 못 먹긴 왜 못 먹어. 아직 안 익어서 그래. 기다리면 제일 달아질 놈이야."
그 순간, 멍해졌습니다. 할머니는 사과 이야기를 하신 거였지만, 마치 제 인생을 두고 하시는 말씀 같았거든요.
'나는 망가진 게 아니라, 아직 익지 않은 것뿐이구나.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 결국 나도 달콤한 맛을 낼 수 있는 존재구나.'
그 '안 익어서 그렇다'는 무심한 한마디가 수만 권의 자기 계발서보다 따뜻하게 제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그날 처음으로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를 지으며 사과 한 봉지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