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졸업상영회 상영작 <태풍>을 본 뒤에
소진에게
어떤 방식으로 너의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다시 서신을 선택했어. 4년 전 봄에 영화를 만들기 위한 편지를 주고받았듯이. 우선은 <태풍>에 대해 말을 해볼까 해. <마와 소 이야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 영화에 대해 보다 담담히 이야기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성 싶다.
어릴 적에,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친한 친구들과 역할극 놀이를 했는데. 물론 이건 의무적인 게 아니었어. 주로, 널널한 시간(당시에는 시간이 지금보다 2.5배 정도 느리게 흘렀으니까) 오로지 재미있기 위해 했던 놀이들이야. 그 때에는 우리 모두 거대하고 강렬한 단어들에 심취해 있었는데, 아마 2000년대 십대 어린이들을 사로잡은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권 탓이 아닌가 싶다. 하여간 우리는 키가 140에서 155 사이쯤 되었고, 각자 자신을 불이나 물의 신으로 지칭하고 엄숙한 말투를 흉내 내었어. 불이나 물, 땅, 식물 등 어쩐지 음양 오행적인 개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세일러문에서도 한가운데 여자아이들이 가장 인기 있는 것처럼, 이 중에서도 인기 종목과 비인기 종목이 있었어. 그 중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대상은 물론 바람이었는데. 여기서 바람이란 말 그대로 어떤 기상현상, 공기의 움직임이야. 우리(열 한 살에서 열 세 살까지의 여자애들)는 바람에 관련된 신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었으나 번번이 실패했어. 기상의 물리학이나 역학에 대해 배우지는 않았으나, 모두가 그게 까다로운 소재임은 알았어.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으며 언제나 다른 물성에 기생하여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듯 느껴졌으므로, 그 역할을 맡았을 때 몸 동작은 특히 까다로웠지. 이 번거로운 성질은 우리가 바람에 대해 느끼는 매력 그 자체이기도 했어.
물론 이 당시는 2000년대 초반으로, 내가 지리산에서 자라고 있을 때야. 2000년 초는 태풍 루사와 함께 시작었지. 규모로만 따지면 그 다음 해 찾아온 태풍 매미가 더 거대하다지만, 루사는 내가 제대로 인지한 첫 태풍이야. 몇 가지 이미지는 아직 선명해. 실상사의 앞뜰에 자랐던 거대한 나무가 뽑혀 나갔고, 집앞의 하천이 넘쳤어. 동네로부터 절로 가는 해탈교解脫橋 외에는 거의 모든 다리가 잠겨 버렸지. 누군가는 죽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름들은 떠오르지 않아. 주위의 이웃들은 집을 잃었어. 그 중 한 가족은 막 아기를 낳은 부부였는데, 그렇기에 우리 집의 작은 방에서 반 년 정도 함께 살았어. 나는 열 한 살이었어. 루사는 재앙이었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재해였는데, 그리하여 텔레비전에서는 매일 죽은 사람들의 명단이 실려 왔는데도, 나는 그 태풍이 마음에 들어서 어쩔 줄을 몰랐어. 텔레비전 너머의 죽음은 우리가 하는 역할극보다도 리얼하지 않게 느껴졌고, 차들이 날아가며 건물들이 무너지는 영상은 꿈 속처럼 보였어. 새로운 가족이 집을 잃고 우리집에서 묵게 된 일도 인생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이벤트처럼 느껴졌다.
그 나이에도 이것을 들뜬 마음으로 표현해서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어. (혼날 것 같았거든.) 그러나 그 때 느낀행복은 아직도 기억 어딘가에 남아 있어. 나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창 밖으로 나무들이 뽑히고 누군가의 지붕이었던 슬레이트가 날아다니는 풍경을 구경했어. 털이 흠뻑 젖은 개들을 창고 안으로 넣어주며 행복을 느꼈어. 내가 누군가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 그 감정에 겨워서 한 번은 부모님 몰래 대문 밖으로 나갔어. 몸을 후려치는 바람에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시험해보기 위해서였다. 그 때 나는 30kg였나, 그 안쪽의 무게였을 거야. 신장은 백오십을 넘지 않았지. 몸은 펄럭였으나 날아가지 않았어. 나는 곧 날아갈 듯 흔들리면서도 몹시 행복했지. 그 때 이 몸이 강하다고, 세상의 한 가운데같고, 미래라거나 세계같은 거창한 이름들이 모두 앞으로의 시간에 속해 있으리라고 믿었어.
너의 영화는 거울 속의 노인으로 시작해. 거울에 반사되는 노인은 마치 바람처럼, 어떤 물성에 기생하는 존재 같아. 그 때 옷장 너머로 또 다른 노인이 등장한다. 내가 너의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라고 들은 사람들은-거울에 비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결국은 영상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반사되지.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형상이 기록되고 있다는 것, 또한 누군가에게 보여질 것이라는 점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움직여. 그들은 영화 속으로 포섭되지 않아. 영화가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애쓸 뿐이지.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꿈틀거리는 바다의 이구아나들이 차라리 상상 속의 동물처럼 보이듯이. 한국의 어딘가에 살고 있는 노인들의 주름진 손과 그들이 늘어놓은 화투-또다시 그 속에서 일렁이는 수많은 꽃들의 이미지. 매화와 모란, 벚꽃, 식물과 동물들. 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자라나며 , 태풍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어.
태풍과 바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카메라를 응시하는 노인의 피부는-너무나 당연히도-시간의 흔적을 떠올리게 해. 바람을 흐름이라는 말과 잠시 겹쳐둔다면, 노인의 몸은 시공간을 흘러온 자국으로 가득하지. 물 속 빛들의 덩어리가 쪼개지고 움직이거나, 숲이 일정한 방향으로 출렁이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느끼게 돼. 저것들은 지금 바람의 흐름 속에 있다. 노인의 몸들도 마찬가지야. 바싹 깎은 머리카락 너머로 보이는 붉은 피부, 눈꺼풀까지 내려앉은 가죽. 그 모든 흔적들.
반면 태풍은 바람의 물리적인 힘에 가깝지. 비바람을 동반하는 동시에 비바람 그 자체라고 해야 하나. 움직인다는 말보다 더 강한 힘으로, 무언가를 뒤흔들고 뿌리 뽑아. 노인들은 어둠 속에 잠긴 집에 불을 켜고 창밖을 바라봐. 그들은 태풍을 기다려.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들은 태풍을, 태풍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 대기하고 있어.
그 시간 속에 한 명의 젊은이-소년이나 소녀라는 말보다는 이쪽이 낫겠어-가 등장해. 숲속에서 물가로 돌을 던지면서. 그는 영화 속 다른 누군가보다, 심지어 바다 이구아나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 그는 중첩되는 이미지 중 하나로써 분명히 존재해. 그러나 그 역시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보이는 일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어. 심지어 영사됨을 통해 관객에게 드러나고 싶은 욕망도 없는 듯 해. 그는 말 그대로 거기에 있을 뿐이야. 스스로를 반사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아.
(가끔 자신을 반사하는 일이 권위의 증언 같다고 생각해. 아무리 소박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바깥으로 반사시키지 않고는 살 수 없지. 우리가 계속 머리를 잡아 뜯으면서도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타인에게 반사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얼마나 있을까. 당장은 바람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네. 그것은 거울에 비쳐지지 않지. 보이지 않으니까. 그 대신 거울을 만져서 덜걱거리게 하지. 우리가 거울로 만들어진 사물의 소리를 듣게 만들고.)
젊은이는 천천히 집으로 다가와. 그가 처음으로 노인과 눈을 마주치고 손을 맞잡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시간이란 단어가 떠올라. 과거 혹은 미래 같은. 지나간 것과 지나온 것. 흐름을 통과한 손과 흐름에 맞설 수 있는 손이 서로를 붙잡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자 하는 게 아니야. 너의 영화 속에서 노인과 젊은이는 과거나 미래 어디에도 대입될 수 있으니까. 그 사실은 둘이 단 한 차례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보다 선명해져. 물구나무를 선 젊은이, 세상에 정반대로 위치하고 있는 젊은이가 묻지. “제가 무엇으로 보이세요?” 노인이 대답하기를, “모과나무로 보인다.” 젊은이가 마주 “그럼 저는 모과나무에요.”말하겠지. 그들의 손들이 맞잡을 때의 접촉을 어느 한 쪽의 것이라고 단정 지어 이야기할 수 없어. 내가 노인과 젊은이를 두 가지 구역으로 나눌 수 없듯이 말이야. 그들은 서로의 접촉과 증언에 따라 자신의 의미를 바꾸고 있으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볼 때 그 움직임을 둘 중 하나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듯이. 오히려 불가분의 관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접촉에 대해 더 말해야 할 것 같아. 태풍은 온도가 다른 공기가 서로 맞부딪치며 일어나. 만남을 통해 일어나는 기상 현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만남이란 가끔은 따뜻하게 들리는 단어야. 대화나 애정 같은 말들을 연상시키지. 물론 적대와 갈등의 시작이기도 하고. 둘 중 무엇이 옳다고 가를 생각은 없어. 둘 다 거기에 있는 거니까.1) 지금 이 순간 그것이 무엇으로 보이느냐를 먼저 물어야겠지. 그렇기에 너의 영화를 들여다보면 바람과 태풍 두 가지를 나누어 의미를부여하는 일은 차츰 의미가 없어져. 움직임과 그들의 만남이 남을 뿐이야.
루사가 지나가고 열여섯 해가 흘렀어. 루사가 흘러가고 열여섯 해가 지났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나무가 뽑혀나간 자리는 흙으로 메웠고, 우리 집에 얹혀살던 가족의 딸은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어. 2002년 이후로도 수많은 태풍들이 지나갔어. 나는 이제 전보다 태풍의 영향이 두려워. 이제는 그들을 들뜬 마음-다가오는 세상을 대하는 감각으로 맞을 수 없어. 사람들이 다치지 않고, 집들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좋겠어. 이런 두려움은 내가 열여섯 해 동안 무수한 흐름을 맞으면서 키워낸 것이야. 그러나 여전히, 창밖으로 바람이 불고 사물들이 덜걱거리는 순간이면 하던 일을 모두 내려놓고 가만히 지켜보게 돼. 무언가가 변하고 있음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속을 지나가는 일 밖에 없음을 재차 깨달아.
소진아, 영화를 만드느라 고생이 많았어. 너와 만나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지만, 너의 영화와 만나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야. 영화에서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사람이 거울에 반사되는 순간처럼. 원본과 실제를 알 길 없는 이미지들을 헤매면서도 그 사이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돼. 이 영화를 보았다고 너를 더 잘 알게 되었다는 말은 할 수 없겠지만, 분명 극장 안에서 다양한 공기들이 부딪쳤으리라고 믿게 된다. 우리 다음에 또 오래 이야기하자. 생일 축하해.
2019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