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방정식
시내에서 차로 15분은 멀지만 서울은 종종 가는
"윤과장. 우리 회식 한번 할까요? 날 좀 잡아봐요."
"예써!"
호쾌하게 대답했지만 그때부터 머리속은 핑핑 돌아가기 시작한다. '신제주에서 먹고 싶은데... 다들 집이 어디였지? 그보다 실장님 댁은 구제주인가 신제주인가...'
구제주니 신제주니 무슨 이야긴고 하니 대충 제주시청이 자리한 구역이 구제주(지금보다 조금 더 과거에 영광을 차지한), 제주도청이 들어선 구역이 신제주(새로운 신도시 느낌?!) 되시겠다. 공항을 기준점으로 동과 서로 나뉘는 이 도민들의 지역구분은 사실 차로는 한 15분 정도, 걸으면 50여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하지만 마음 속의 거리는 꽤나 먼 편이라서 이렇게 직장에서 회식을 잡거나 친구끼리 약속을 잡게 되면 은근 신경전이 벌어지고는 하는 것이다.
수도권에서 도시락에 꽉 눌려담긴 밥알처럼 매일 3시간을 왕복으로 출퇴근도 하던 나였기에 처음 제주에 발을 디뎠을 즈음만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택시로 15분이면 강남역에서 삼성역도 안간 거리인데 뭐가 멀다는 건지, 때로는 투덜거리기도 했다.
같은 시 안에서도 이러하니 서귀포라도 가는 날이면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하기 마련이다.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대부분 내가 데이트한다고 생각하진 않는 듯) 굳이 그 멀고 험한 곳을 왜 가냐는 것이다. 한시간이면 가는데요? 아무리 멀어도 2시간 안이면 가는데? 그러면 도민들은 혀를 내두르며 말한다. "야이 서울 아이는 서울아이인게.", "한시간이 안머냐?", "하영 심심하면 우리집에 와 미깡따라."
어쩐지 어마어마한 여행자 내지 방랑자가 된 기분이랄까? 엣헴. 제가 바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는 신출귀몰한 윤길동 되시겠다 이 말씀 이외다.
그러나 기상천외하게 바지런했던 나조차도, 제주에 10년째 머무르다보니 어느새 구제주와 신제주 사이의 부담을 호소하게 되었다. 사실 이는 내 장농면허를 심폐소생시켜 붕붕이를 몰게 된 것이 사실 큰 요인이기는 하다. 동료들과 친목을 다지기 위한 행위(네... 뻔한 그것입니다.)를 하려면 15분 내외 거리에 기본 만오천원을 호가하는 대리운전비에 나의 애마가 어느덧 애물단지가 되어버리는 가슴아픔을 느꼈기 때문이랄까? 사정이 이리하다보니 더욱이 서귀포까지 가게 될 때는 파워 P인 내가 미래의 음주가능성을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예측하고 이런저건 계산을 거쳐 그 결과 값을 반드시 사수하는 무척 J스러운 인간형으로 변모하였다.(네... 방금 몇 J들의 비웃음 들렸구여)
한편, 나의 오리지날 제주 지인들에게선 때로 아주 놀라운 호방함을 느낄 수 있는데, 그건 바로바로 그들이 육지(또는 해외여행)을 갈 때이다.
후배 중 하나의 취미는 외국인 가수(미안하다... 너의 최애들에게도 나름의 장르같은게 있을진데)의 내한공연을 가는 것이다. 이미 '내한'이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접근 가능한 이들에게조차 티켓값도 상당한 편일텐데, 이 친구는 주말근무 등 시간적인 제한만 없다면 체력이 허락할 때까지 공연에 참석한다. 덕분에 티켓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공연을 즐기기 위해 사전에 학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접체험할 수 있었다. 희한한 것은 그녀에게 콘서트 티켓값이 올랐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어도, 항공료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내가 무언가에 깊이 빠져 뜨겁게 살지 않아서일까?거꾸로 서울에 살았던 내가 누군가의 팬이라면 나는 쉽게 그가 하는 제주 콘서트 티켓을 끊을수 있었을 것인가?
내겐 대단히 거부(엄청난 부자)스러운 항공료를 디폴트값으로 놓는 사고방식은 특히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그들에게 아이 생일을 기념하여 서울에 있는 롯데월드나 키자니아를 가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가끔 회사일로 바쁠 때는 이런 행사가 격년제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공연이나 박물관 등을 가기 위해, 또는 여행의 목적으로 육지를 방문하는 것은 그들에게 몇번 고민해보아야 하는 심사숙고의 대상이 아니다. 특히 비행기 값에 대한 고민은(티켓이 없거나 진짜 말도 안되게 비쌀 때를 제외하면) 너 오늘 그림자 챙겼어? 와 같은 절대 할일이 없는 말 중 하나이다.
15분 거리는 멀다하면서 육지로 나갈때는 육지사람이 제주올때 하는 고민의 반에 반도 안하는 이 멋진 사람들이 나는 아직도 너무나도 신기방기하다. 이들에게 있어 비행기 티켓값은 마치 경기도민이 서울갈때 지하철비나 버스비는 따로 여비로 신경쓰지 않고 으레 나가는 기본값으로 여기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가끔 부모님을 뵈러가는 불효녀인 나로서도 항공료는(특히 수학여행 몰리는 이런 시즌엔) 상당한 부담인데...ㅠㅠ
도민 할인율 좀 더 높여주쇼!!!!!! 항공사 어르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