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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pr 25. 2024

시쓰는 밤

기억 또는 망상, 같고도 다른 이름




어느 날 새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회상하고는 했습니다 검은 숲을 헤쳐나온 그 찬란한 어느 밤 아버지의 손에 무결을 뭉쳐놓은 것 같은 존재가 있었다고.


새는 아버지를 먹으며 자랐습니다 손 거스러미 사이 흐르는 거친 땀과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슬픈 술과 더러 볼 위를 적시던 뜨거운 눈물을 마시며


새는 때로 보답인양 햇살을 물어 깃털 사이로 부벼내 봉긋한 계절을 만들어내었는데 그것은 꽃이 되기도 하고 눈이 되기도 하였으나 늘상 아버지의 애절함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새는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검붉은 상자 안에서 빛으로 날아가던 날 그저 피같은 울음소리만 발자욱처럼 남았습니다.





외가


외할머니 집 어귀에선 늘 달큰한 과일향이 났다 나는 사촌과 새빨간 촌스런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강처럼 빛나는 은색 대야에서 손을 뜰채 삼아 햇빛을 건져냈다 온통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던 길다란 펌프 나보다 딱 머리 하나 작았던 그 친구를 사촌과 나는 어지간히 못살게 굴었다 손잡이를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당기면 못살겠다 엉엉 울듯 물을 콸콸콸 토하곤 했다 하루는 파란 대문 밖으로 백숙이 되려던 털빠진 뽀얀 닭 한마리가 도망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삼촌들이 우르르 저 닭 잡아라 꽁무니 빠지던 그 기억은 정말 꿈이었을까


외할머니는 어느 날 꽃으로 덮히어 떠났다 파란 대문 대신 하늘이 은빛 대야 대신 달이 빨간 수영복 아이 대신 휘적휘적 춤을 추며 저 녘의 누군가가 맞이 했을 것이다


콸콸콸 눈물이 나왔다 아무도 당기지 않았는데 못살겠다 하면서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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