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지위가 남아있는 곳, 제주
신구간 세일을 아시나요?
서울에는 없지만 제주에는 있는 특별한 세일기간을 알고 계시는지? 1월 말 정도부터 2월 초까지 제주를 돌아다니다 보면 가구점이나 전자제품을 파는 곳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광고 문구가 있다. 바로 '신구간 세일'.
들어는 보았는가? 제주 오리지널에겐 익숙하지만 나같은 이주민이라면 아마 고개를 갸웃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구간? 새학기 시작하기 전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는 그런 기간이라는 것일까? 요 의뭉스러운 구간은 특히 '이사'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시기가 되기 전에 이사갈 집을 미리 알아봐야 한다는 것. 신구간이 지나면 한동안은 전세나 월세를 구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많은 이들이 신구간에 맞춰서 거처할 곳을 옮기기 때문이다.
신구간은 '신'의 구간이다. 여기서 이 '신'이란, 우리 조상들이 집의 대문에도, 부엌에도, 화장실에도 있다고 믿었던 어떤 영적인 존재인데 이들이 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던 조상들은 신을 존중하며 살았다. 제주에는 무려 1만 8천여의 신들이 있다고 하는데, 신구간은 바로 이렇게 옥황상제의 명에 따라 인간의 생에 여러모로 역할을 하던 신들이 모두 하늘로 올라가 다시 담당을 부여받는 일종의 조직개편 시기이다. 그들이 하늘에서 종무식과 시무식을 하고, 인사위원회를 여는 동안 인간의 생은 잠시나마 자유(?)의 시기에 놓이게 된다. 인간들은 이때다 싶어 신들이 싫어하는 온갖 일들을 몰아서 해치우게 되고, 이 때 벌어진 건에 대해선 옛 담당신과 새로운 담당신의 소관이 불분명하여 책임에 대한 부분도 애매해져버리므로 이 때만큼은 모든 신이 에잉 나몰라라 하게 된다는(혹은 관용을 베푼다는) 것이다.
인간이나 신이나 시스템의 부재에서는 역시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싶어 재밌기도 하다. 동티를 피하려는 인간들은 이때 이사를 하고, 집을 수리하고 여러모로 새로운 앞일을 도모하게 되니 신구간이 곧 새로움을 품는 기간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신의 존재를 거의 느낄수 없던 서울에서 살던 나로서도 제주에서 부유하듯 살게 되면서 이 신구간을 영 무시하며 살 수는 없게 되었다. 잘하면 사고 싶었던 제품을 비교적 싼 값에 구입할 수도 있고, 잘못하면 이사갈 집을 제때 구하지 못해 내내 발품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가 고파 음식을 먹었는데 나중엔 음식을 보면 갑자기 배가 고픈 것처럼 느껴지는 것처럼(그래 그건 나뿐일지도... ) 신구간에 맞춰 이사를 하고 물건을 사들이다 보니 어쩐지 이젠 정말 그 구간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십여년전에 비하면 이제 신구간도 예전 같지 않다는 말들도 많다. 이주민이 늘고, 도시화가 가속되면서 신구간을 일종의 미신으로 취급하여 신구간이 아닐 때에도 이사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전제품이나 가구도 온라인 구매율이 높아지면서 신구간 할인보다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겨 신구간 마케팅도 힘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제주 오리지널에게 신구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회사의 한 선배는 이사간다는 내게 새 집에 밥솥부터 들여놓으라 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래야 집안이 평안하고 배곪는 일이 없이 부유해 진다는 어른들 말에 본인도 이사할 때마다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다른 친구는 집에 소금이나 팥을 먼저 뿌리라고 조언을 해 주었는데, 부정이나 악귀를 쫓기 위해서라고 했다. 시댁 제사날이면 며느리들은 연차까지 써가며 손수 정성스레 제사 음식을 해 올린다(서울에서 내 주변인들이 조상들에게 불효한 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에게 신은 늘 생각하는 자식같은 존재는 아닐지 몰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자 방식인 것이다.
누군가는 참 쓸데없는 미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려 1만 8천의 신이, 여기 제주를 위해 지금도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어쩐지 거대한 보살핌 처럼 느껴져서 영 싫지만은 않다. 신들이시어, 내년 이사 때는 조직 개편하시기 전에 안전하고 멋진 집 하나 점지해주고 가시옵소서... 애인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