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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라야노을 Aug 27. 2023

마지막 소풍, 그리고 생각의 고통

신형철 작가의 "인생의 역사"를 생각하며

평생을 몇 평 남짓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온 암사자가 있었다.

조그만 울타리 생활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수사자는 오래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고,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루 한번 먹을 것을 주고 가는 남자와 마주치는 것 말고는 늘 혼자였다.

가끔씩 뒷산에 살고 있는 다른 동물들이 내려와 마주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늘이 보이는 울타리였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 지독한 외로움과 숨 막히는 작은 공간을 20년이나 견뎌냈다는 것이다.


어느 날 먹을 것을 주러 온 남자가 울타리 안을 청소하고 있는 사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뒷문이 열렸다.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춤을 추듯 햇빛이 반짝거리고, 다시 한번 흘러들어온 시원한 바람을 들이마신다.

햇빛이 일렁일 때마다 저 멀리 파랗고 넓은 하늘도 한 번씩 보인다.   


암사자가 일어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걸어 나간다.

20년 동안 울타리 안을 서성이며 살아온 탓에 뛰는 것은 다 잊어버렸고, 어디론가 도망가려는 의지도 잊힌 지 오래이다.

그저 나무와 풀들 사이를 이리저리 조금 걸어보다가 앉았다.

벽이 없는 숲은 너무 넓고 금방 힘이 들었을 것이다.


저 멀리, 밥을 주러 오는 남자가 보인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가오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20년 만의 짧은 소풍은 그렇게 끝났고, 외롭고 숨 막히던 삶도 끝이 났다.

사람도 동물도 마지막을 직감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어쩌면 스무살이 넘은 노사자가, 가야 될 시간을 직감하고 문을 나섰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모자이크 한 마지막 모습은 마음이 너무 아프다.

울타리에서 몇 년을 더 살았다 해도, 울타리 구석에 웅크린 채로 평화로운 마지막을 맞았다 해도, 이 아픔이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은 더 슬프고 더 아프다.

 

살면 살수록 생각의 고통이 크고 무거워짐을 느낀다.

생각 없이 살기도 어렵고, 적당히만 생각하며 살고자 하지만 적당한 만큼을 알기도 어렵다.

너무 오래,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힘이 든다.


신형철 작가의 "인생의 역사"에서 고통의 각으로 역사가 시작되는 이유도, 삶에 대한 생각의 고통이 그만큼 크고 무겁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불행의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인간은 자신의 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견디느니 차라리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헤매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내 아이가 어처구니없는 확률(우연)의 결과로 죽었다는 사실이 초래하는 숨 막히는 허무를 감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이 모든 일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섭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살아있는 자를 겨우 숨 쉬게 할 수 있다면, 신은 그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신을 발명한 이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견뎌낸 사람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 중에서)


다음 생이 있다면, 이번 생에 못한 만큼을 더해서 넓은 들을 오래오래 뛰어다니며 많은 무리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사자에게-

(2023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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