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테이블 아이가 낱말 퀴즈를 풀고 있다. 사실 연필은 아이 손에 있는데, 문제는 맞은편에 앉은 아이의 아버지가 더 열심히 풀고 있다.
"어? 꽃이 필 때 어떻지?"
"꽃?" "그래, 꽃."
"몰라."
"강아지는 멍멍. 고양이는 야옹. 꽃은 뭐야?"
"방긋."
"아니, 휴..."
꽃이 어떻게 피더라, 덩달아 귀가 쫑긋해졌다.테이블 위에 놓인 책은 글씨보다 그림이 더 많은 알록달록한 책. 새 책인지 잘 넘어가지 않는 빳빳한 페이지를 아이가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평평하게 만들었다. 몇 개의 블럭이 십자형으로 맞물려 있는 낱말 문제 위로 아이와 아버지의 머리가 가까이 맞대어 있다.
"이거 저번에 시은이가 말했는데."
작달마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던 아이가 말했다.
"몰라..."
"생각해 봐, 꽃이 필 때 어때?"
"예쁘게?"
"아니..."
이쯤 되면낱말 퀴즈가 아니라 스무고개 같다고, 생각할 때쯤 아이 아버지가 말을 멈추더니 팔을 들어 원을 그리며 대뜸 말했다.
"자, 봐봐. 꽃이 어? 이렇게 활짝..."
어색한 정적뒤로빨대를 얼른 입에 가져다대는 듯했지만 빈 컵에서는 공기 빨아들이는 소리만 요란하게 났다. 머쓱함은 왜 옆테이블의 나에게까지 전염되는가. 작금의 상황에도 다행인 사실 하나는 중간에 말을 멈춘 덕분에 아이는 답을 아직 모른다는 것이고, 불행인 사실 하나는 옆 테이블의 내가 그 답을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그, 잘 모르겠으면 옆에 문제부터 풀어볼까?"
"응."
"자."
아버지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포유류의 한 종으로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는 종', 이거 뭐라 그러지?"
'아니...'
이번에는 내가 머리를 감싸쥐며 생각했다.
'아버지... 문제가 너무 어렵잖아요...'
*
내 일생의 뇌 리즈 시절은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 한글을 막 배울 무렵에 있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한글을 꽤 빨리, 그리고 금방 뗀 편이었다. 그때의 나에게 한글은 글자라기 보단 일종의 퀴즈 같은 거였다. 열네 개 자음과 열 개 모음의 조합. 듣고 말하는 것보다 글자를 조합해서 읽고 쓰는 게 훨씬 재밌었다. 쨌든 그때 평생 동안 써야 하는 두뇌의 명석함을 신나게 당겨쓴 탓인지, 나는 서른이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한글을 배우는 사람처럼 처음으로 국어 사전을 샀다. 그것도 중고로.
중고 사전은 없는 물건 빼고 다 있다는 중고 나라에 '낙서가 조금' 있다는 이유로 싼 값에 올라와있었다.중고적인 물건들은 부차적인 설명이 붙을수록 설명이 변명이 되므로, 이 값이면그저 횡재라 생각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부터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택배로 날아온 사전에는 '장예진, 의 동생 장유진, 의 동생, 장진우' 라고 쓰인 대문짝만한 낙서가 쓰여있었다. 세 남매로 이어지는 유구한 대물림의 역사 아래에 내 이름을 써넣으며, 내가 이 사전의 마지막 주인이 되기를 잠시 빌었던 것 같다.
밤에는 사전을 읽었다. 왼쪽에는 사전을, 오른쪽에는 노트를 놓고 마음에 관한 단어만 따로 받아적었다. 사전 한 권에 마음 단어가 몇 개나 있을까. 그 질문은 ㄱ을 다 읽기도 전에 의미를 잃고 말았다. 사전에게는 모르는 마음이 없었고 설명할 수 없는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적은 마음들이 1400개가 넘었다. 나는 이 마음 중에 과연 몇 단어나 알고 있었을까. 그런 걸 묻곤 했었다.홀로있을 때였다.
마음이 쓰인다는 표현이 있다. 어떤 일에 온 신경이 쓰일 때, 마음 한 쪽이 어떤 사람에게 자꾸만 기울어질 때 쓰는 표현이다. 마음을 쓰는 시간은 마음이 쓰이는 시간이었고 마음이 쓰이는 일은 마음을 쓰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기역에서부터 히읗까지. 지루하고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이었음에도 끝내 마지막 장에 닿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거창한 인내심이라던지 성실함, 지구력 때문이 아니라 사전을 넘길수록 차고 넘치게 쌓여갔던 까닭 모를 간절함 때문이었다.
한 장, 또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깨달았다.
나는 어떤 단어를 찾기 위해 사전을 읽고 있는 게 아니라, 사전이 도리어 나를 찾아주기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카페를 좋아한다. 1년 365일 중 360일 정도를 가는 정도라면 사랑한다고 말해도 좋겠다. 이 지긋한 외사랑의 존재감을 깨달은최근의 계기 중하나는 책을 출간할 무렵에 있었다.
출판사와 계약을 한 뒤로 전담 편집자가 생겼다. 말로만 듣던 편집자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편집자와 일을 하면서 하나씩 알아갔다. 편집자는, 그러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작가와 독자를 잇는 중간자의 입장이라고 할까. 그는 때론 작가인 나를 대신해줄 때도 있었고 반대로 독자의 입장을 대변할 때도 있었다. 하여 내가 습관적으로 써서 지나치게 자주 쓰는 접속사를 빼거나 혹은.
"작가님, 우리 이 글에서는 카페 말고 다른 데 가는 걸로 하면 안 될까요?"
너무 자주 가는 장소를 빼는 식이었다.
"다른 데요?"
"네, 다른 데 아무 데나."
"아무 데나로 뭐 적당한 데 없을까요?" "영화관은 어때요?"
"CGV를 가던 길에?"
"그건 좀 TMI..."
"그럼 버스를 타고 가던 길?"
"아니면 지하철"
"아니면 기차?"
글 속의 화자는 버스도 탔다가 지하철로 갈아타기도 했고, 영화관은 미술관으로 둔갑되었으며, 골목길은 대로변으로 바뀌기도 했다. 종횡무진 서울을 떠돌던 끝에 결국 제안이 나왔다.
"그냥 '가던 길'이라 할까 봐요."
우리는 서로 다른 박자로 그렇지만 같은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던 길로 하죠. 가던 길 괜찮네요. 뭐 가던 길 맞으니까요. 웅얼거리며 생각했다. 그래, 나는 분명 어딘가를 가던 길이었을 테니까. 하물며 그 길이 어딘가로 돌아오는 길이었더라도 그때는 가는 길이라 여겼을 테니까.
정답을 놓고 정답을 말해버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길 위에서 어디를 가야 좋을지 고민하던 카페에서의 어느 대화를 문득떠올린다.
*
옆 테이블 아이가 낱말 퀴즈를 풀고 있다. 카페 창 밖의 고양이가 담벼락 위로 폴짝 뛰어오른다. 올해 겨울은 예년보다 따뜻하다던데.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따 을지로입구역으로 갈 거지? 갖은 대화들이 테이블 위에서어지러이 교차되는 곳.
노트북화면은 십자 낱말 한 칸 만큼의 공간.검은 화면으로 고개를 돌려잠든사람을 깨우듯 마우스를 흔들어 노트북을 깨운다. 졸린 눈을 가진 커서가 느리게 깜빡인다. 부유하던 낱말들을 몽땅 지운 자리는 다시,새하얀백지가 되어있다.
아이는 앞으로 수많은 낱말 퀴즈를 만나겠지.정답이 아닌 정답과 오답이 아닌 오답들을 알게 되겠지. 사전의 안이 아니라 사전의 바깥 세상을 향해 나아가겠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들, 기억들, 잊었던 꿈들, 잊혀진 이름들. 마흔 일곱 개의 마음을 담은 한 권의 사전을 엮어내는 일또한 낱말 퀴즈를 푸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는 걸 나는사전을 한 권 쓰고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