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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현지 Mar 31. 2020

코로나 연대기

재택근무 4주차 5일의 기록

글쓰기를 시작했다. 작년 6월 '꽁치 회고록' 이후 처음이다. 글보다는 영상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그렇게 재미가 있다. 브라운관이나 종이를 뚫고 나오는 유머에는 잘 반응하지 않는다. 무한도전도 딱히 웃기다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주변에 그런 사람은 나뿐이었다.
글 역량이 중요한 마케터로 살고 있지만, 글쓰기를 가깝지 않은 동료쯤으로 여겼다. 애써 친하지 않고, 둘만 있으면 서먹하고, 굳이 밖에서 사적으로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꽁치 회고록의 열혈 독자였던 보람님이 "현지님, 글을 써 보시면 좋겠어요."라고 고마운 조언을 했을 때도 입보다 머리가 먼저 거절했다. 입은 "네! 언젠가는요." 라며 스윗하지만 기약 없는, 제안 거절 메일을 잘 쓰는 제휴 천재답게 임했다. 역시 세상에 불필요한 경험은 없다.


그때의 나는 알았을까? 내가 조만간 갈 곳 없고 말할 곳 없는 집순이가 되어 퇴근 시간만 기다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것도 '글이 쓰고 싶어서'라는 전혀 믿기지 않는 이유로.


믿기지 않는 사실은 이뿐만이 아니다. 2020년 겨울과 봄 사이, 전 세계에 전염병 '코로나'가 유행해 경제, 교통, 각 국의 교류가 끊기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현재 마스크를 구하는 것은 몇 시간 줄을 서도 힘든 일이 되었으며 마트에 휴지와 생수가 동나고 아이들은 학교 조차 가지 못한다.


전염병은 초등학교 때 애청자로 활동하던 역대 사극 시청률 1위 드라마 '허준'에서 역병으로 불리던 때나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현대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에서는 두려움보다는 귀찮음에 가까웠다. 어쩌다 걸리면 '운이 좋지 않아서'라고 생각했고, 약 먹고 쉬면 금세 괜찮아졌다. 길을 가다 병원 앞에 '독감 예방 주사 맞으세요.'라는 포스터를 마주쳐도, 회사 복지 차원에서 그 주사를 심지어 할인까지 해준다고 해도 딱히 고맙지 않게 흘려버렸다. 대부분의 우리가 그랬다.


먹어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약이 개발되기를 간절히 꿈꾸었던 2020년. 전염병 코로나를 종식시키려는 정부의 지침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허준의 후손 허현지는 4주째 집으로 출근 중이며, 주말이면 집에 붙어있을 새 없던 외향형 인간이 비자발적 집순이가 되어 외부와 격리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세상이 믿기지 않는 사건들의 연속이라면, 재택근무를 시작하며 글을 쓰게 된 내가 유명인이 된 미래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훗날 누군가가 살아온 업적에 더불어 "코로나 시국을 어떻게 견뎌내셨나요?"하고 물어온다면, 전쟁에서 승리한 용사 같은 비장함을 머금고 이야기하리라 하는 망상으로, 망상보다 더 한 현실을 기록한다.
 


재택근무의 서막


사회적 동물로 점수를 매긴다면, 10점 만점에 9점 이상일 것이라 자평한다. 일상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회사는 단순 돈을 버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2주간의 전사 재택근무를 통보받았다. 그 전주까지만 해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올 때 코로나' 이딴 농담이나 했는데, 위험하니 회사에 오지 말라니. 이 충격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 지나친 무지를 반성한다.


시작은 나쁘지만 또 마냥 나쁘지만 않았던 것은 재택근무를 하면 점심을 직접 만들어 먹을 계획이 있었다. 평소에 요리라고는 컵라면 끓이기 정도도 안 하는 인간이지만, 재택근무를 명 받고 돌아오는 퇴근길 마트에서 장을 16만 원어치나 보았다. 동료들을 못 만나는 삶은 답답함, 지루함 투성이겠지만 나름의 극복 플랜을 요리로 세워 둔 셈이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그랬던 내가 재택근무 4주 차를 살아가게 될 줄이야. 요리의 역사는 딱 3일. 첫째 날은 아삭한 숙주를 슬라임으로 만들었고, 둘째 날은 빵을 태웠고, 셋째 날의 떡볶이는 검은색이 되었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요리를 하지 않으며, 재택근무의 장점을 1도 찾아볼 수 없는 삶을 산다.

 

이제 어떻게라도 장점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재택근무라는 덫에 걸린 사회적 동물은 조만간 외진 동굴(전농1동 내 방) 어딘가 에서 실의에 빠진 채 발견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스스로 빠져나오는 자구책을 만들기로 하며, 반드시 하루에 하나씩 재택근무의 장점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4주차 5일의 기록


1일. 소비가 줄다


사회적 동물로 탑티어 계급에 속하는 나는 이 명성을 지키기 위해 인맥 유지비용(밥값, 술값, 커피값)과 겉치레 비용(헤어, 화장품, 옷)에 과하게 투자를 해왔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소비요정이나 최근 구매 내역을 보니 단 2건밖에 없다. 그것도 린스와 바디클렌저. 이대로 살면 이재용은 아니더라도 이부진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난 현실 감각이 뛰어난 편이라 딱 1초만 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파마를 하기에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마를 하면 '이틀간 머리 감으시면 안 돼요.'라는 국룰을 따라야 한다. 세상이 발전해도 머리를 즉시 감을 수 있는 파마약 개발은 아직인 걸까? 마치 코로나 백신같네. 궁시렁 대보지만 긴 생머리에게 파마는 치명적인 지출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이 국룰은 국법으로 승격된다. 열심히 지켜야지. 준법정신이 투철하니 파마는 언제 해도 괴로운 대상이 된다. 주말을 이용하더라도 꼭 하루는 머리를 감지 않을 채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굳이 파마라는 이유가 없어도 머리를 매일 감지 않는데 나이스 찬스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파마를 해도 볼 사람이 없다는 점을 간과했다. 세수도 하루에 한 번 밖에 안 하는데 과한 사치처럼 느껴진다. 이대로 가면 이부진이 되지 못할 것 같다. 장점은 소비 2건 정도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2일. 인류애를 회복하다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재택근무에도 야근이 있다. 나는 오늘 오후 11시 42분에 업무를 마치고 11시 43분에 집으로 퇴근했다. 1분 만에 퇴근한다는 것은, 그것보다 출퇴근길에 대중교통을 타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다. 인류애를 상실하는 날이 매일 반복된다는 것을 그새 잊고 있었다.


지하철은 내리고 타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건지 알 생각이 없는 건지, 옆 공간이 널널한데 왜 계속 내 쪽을 밀치고 들어오는지, 백팩은 니만 편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지, 왜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핸드폰을 올려 무게를 떠넘기는 건지, 냄새나는 김밥을 여기서 먹는지, 굳이 지금 이 장소여야만 했는지.

 

대중교통을 타지 않는 장점을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주를 버틸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조금 전 재택근무가 2주일 더 연장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럴거면 차라리 차를 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대중교통 안타는 장점을 두 번 더 크게 복기해보기로 하였다.


3일. 친절의 아이콘이 되다


회사로 출근하는 삶은 하루를 미팅으로 시작해 미팅으로 끝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팀 회의, 제휴사 회의, 프로젝트 회의, TF 회의. 업무 시간 대부분을 미팅으로 채우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 '이제 일을 해볼까' 하고 노트북을 키는 삶. 이 주제로 대한민국 직장인들과 함께 손병호 게임을 하면 오조오억명이 손가락을 접겠지?


현재 속한 미팅과 하고 있는 일이 우선 시 되다 보면 쏟아지는 업무 메시지에 답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도 상대방은 이해해 준다. 꽤 오랜 시간 답장이 없어도 혹은 '네' 정도로 메시지를 끝내도 괜찮다. 회사 안에서 개개인의 행동은 매우 투명한 것이기에 바쁘겠지 추측할 뿐 성실함에 대한 의심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미팅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오는 메시지에 빠르고 정성스럽게 답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는, 다른 업무를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해도 자칫 '재택근무로 꿀 빠네'소리를 듣는 월급 루팡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텍스트로만 대화가 오가다 보면 글자 하나에 의도치 않은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오해를 사기 싫은 나는 출근할 때 보다 더욱 열심히 답장에 임한다. 업무 피드백도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부족할 만큼 열심히 한다. 평소 '감사합니다.' 정도로 끝낼 수 있는 일도 감사해요. (꾸벅) 좋은 하루 보내세요. 라며 오바육바로 반응한다. 상대방은 이게 그렇게까지 고마울 일인가 의아할 수 있겠지만, 친절에는 호불호가 없는 탓인지, 외로움은 나만의 일이 아닌 탓인지 매일 랜선 베스트 프랜드가 1명씩 생겨난다. 재택근무의 순기능이 분명하다.


4일. 필요 없는 미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은 위기가 왔다. 도저히 장점을 찾고 찾아도 모르겠길래, 대체 뭐라고 쓰지. 그렇다고 주작은 내 스타일이 아닌데. 절필을 할까, 4일차는 공백으로 둘까. 오만가지 생각이 오가던 도중 전화를 한통 받았다.


하는 업무도, 이름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기업 담당자가 다짜고짜 만나자며 미팅을 요구한다. 이런 무례한 요청은 매우 높은 확률로 논의할 안건조차 없을 때가 많다. 일단 만나기만 하면 콩고물이 떨어지리라고 믿는 유형으로, 바쁜 시간을 쪼개서 만나면 업무와 1도 관련 없는 TMI를 실컷 방출하다 이상 기류를 감지한 그제야 업무 이야기를 꺼내보지만 대 다수가 이런 말. "그쪽(내 회사)은  아이디어가 많으시잖아요. 좋은 것 뭐 없을까요?"

니즈가 있는 것도 당신, 미팅 요청한 것도 당신인데 왜 나에게 신박하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요구하지? 저렇게 일하면 행복할까? 가끔은 노여움보다 안타까움이 더 크다.


그러나 제휴 업무를 맡고 있는 이상 필요 이상으로 친절할 의무가 있다. 검토를 할 수 없는 수준의 내용이라도 매번 타당하고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거절해야 한다. 이럴 땐 현 상황이 특효약이다. "4월 초까지 재택근무라서 외부 미팅을 할 수가 없고, 언제 더 연장될지 모릅니다." 구구절절 물고 늘어지지 못하는 깔끔한 거절법이 생겼다.


재택근무의 장점을 찾지 못할 뻔했는데, 마침 전화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개 똥 코로나도 약으로 쓸 일이 있음에 감탄해야 하나.


5일. 평범함에 감사한다


단어로 말하자면 산소, 땅, 불, 물. 문장으로 말하자면 엄마가 옆에 있는 일, 내가 숨을 쉬고 있는 일처럼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들이 있다. 당연함의 부재는 그럴 것이라 예상했던 존재보다 더 큰 두려움과 상실감을 동반한다. 지금 내게 평범한 일상이 그러하듯.


동료들과 회사 7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시덥지 않은 수다로 낄낄대고, 가끔 느낌적인 느낌이 통하면 퇴근길에 함께 맥주를 마시는 일. 별 뜻 없이 임했던 하루 일과에 모두 엑스표가 그어졌다. 집에서 홀로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고, 미팅은 화상 회의로 대신하며, 사적인 만남이나 회식은 각자 먹은 점심 메뉴를 물어보는 것으로 대체된다.

행복한 마케터스 일상

평범한 일상을 잃고 나니,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있었는지를 새삼 실감한다. 그동안 나는 몹시도 평범하여 행복에 겨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재


학생들의 개학 날짜는 4월 초로 연기되었고, 나의 재택근무도 2주 더 연장됨에 따라 5주차를 맞이했다. 초반에 꽤 힘들어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렇게 적응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임이 분명하고, 나는 인간의 평균보다 조금 더 적응을 잘하도록 진화한 적응적응인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


벚꽃연금이 음원 차트를 역주행하고, 봄바람에 각종 여행지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으로 붐비고, 난 그 사이에 행복한 커플들을 눈꼴시렵게 바라보던 클리셰 대신. 밖을 못 나가 시간과 체력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집에서 달고나 커피를 500번 저어 마시고, 사이버 강의와 재택근무를 하며 생기는 우스운 썰을 SNS에 도배하고, 넷플릭스에 재미있는 콘텐츠를 서로 앞다투어 추천해주는 현재를 마주한다.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나를 재택근무와 글쓰기의 길로 인도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겪어내고 있는 모든 것들이 개인과 사회,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변화시킬 것이라 예상한다.

현재는 역사의 거대한 연대에서 큰 변화를 이끌어 낸 물살로 기억될 것이고, 이 시기를 잘 버텨낸 우리는 서로의 공감대로 충만한 연대를 형성하는 미래가 올 것이다.

 

늙는 건 원치 않지만, 하루빨리 먼 미래가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염원하며, 이쯤 되면 '세상에 장점을 가지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라는 띵언을 떠올린다.


불과 몇 달 전,

이 말이 이토록 간절해질 줄 누가 알았을까?


마스크 안쓰고
대중교통 타고
회사에 가고 싶다.



*가끔 의심이 들 때면 ‘반면교사’라는 말을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나도 자주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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