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글은 여전히 의미를 지니는가
인공지능이 대중적으로 본격화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미 인간이 담당하던 많은 역할을 인공지능이 대신하는 장면들을 우리는 실제로 목격하고 있다. 그동안 예술 창작은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여겨져 왔기에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라 여겨졌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에도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고민의 시간 없이 문장을 생산해내는 대규모 언어 모델의 능력을 보다 보면, 이 시대의 ‘글쓰기’라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하게 된다.
이에 대해 나는 가브리엘 마르셀을 떠올린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흔히 ‘나는 몸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나는 내 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한다. 즉 인간의 몸은 단순히 소유의 대상이 아니며, ‘참여’의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내는 존재의 방식 그 자체인 것이다. 인간의 주체성과 존재 방식은 이 ‘몸’을 통한 육체적 경험을 통해 완성된다고 마르셀은 보았다. 그렇다면 육신의 부재로 인해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주체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몸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느끼는 창작의 고통 또한 단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체험이다. 창작물은 종종 그러한 고통의 흔적과 결과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바라볼 때 작품 자체가 지닌 내재적 특성과 더불어 외재적 특성, 특히 작가의 삶의 맥락을 고려하여 작품을 의미 있게 판단한다. 그 이유는 작가가 살아 있는 육체로 겪은 삶과 고통이 창작물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결과물 이상으로 예술로 받아들이게 된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창작물은 그 탁월한 기술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몸’과 ‘몸의 체험’이 결여되어 있다. 감각과 감정, 고통을 통한 체험이 배제된 상태에서 생성된 문장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어떤 윤리적, 실존적 깊이를 획득하기 어렵다. 물론 인간이 인공지능을 도구로 삼아 창작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논의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이 ‘예술가’라고 불리기에는 무언가 본질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글쓰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몸으로 세상을 살아내고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 살아낸 육체적 경험을 토대로 글을 쓸 때, 그 글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어떤 고유한 무게와 흔적을 지닌다. 결국 육체를 통과한 문장, 살아 있는 삶이 배인 글만이 진정으로 글을 글답게, 예술을 예술답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