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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an Apr 25. 2023

두려움과 자극을 뺀 비건 쌈밥

간소한 한 끼가 준 사소한 용기에 대해

고기가 없어도 쌈은 맛있다. 


살아간다는 건 원래 두려움의 연속이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다른 사람들의 일과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의 두려움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 FOMO(Fear of missing out, 포모, 고립공포감)라는 심리학 용어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두려움을 잘 설명해 준다. 시간을 보내는 방식, 나의 취향 등 여러 가지를 타인과 비교하고 이러한 두려움은 현재 중요한 것들을 뒤로하고 잠재적 가치를 가진 것을 계속 쫓게 만들기도 한다. 거기서 문제가 끝나진 않는다. 일단 어떤 것이 유행이 되면, 또 다른 잠재 가치를 가진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는 압박과 두려움이 뒤따른다.



몇 주 전 브런치에도 공유했던 해초 비빔밥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정성스럽게 영어로 캡션을 달았고, 내심 뿌듯했다. 외국인들은 아직 해초라는 재료를 잘 모른다. 신기하고 궁금한 음식을 소개한다는 건 음식의 맛, 플레이팅만큼이나 어느새 요리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느낀 뿌듯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간혹 해외 파인 다이닝에서 재료로 쓰는 것 같기는 한데, 쓰는 해초의 종류들이 한정되어 있는 편이었다. 얼마 전부터 저-기 북유럽의 힙한 식당이 일본 교토 팝업을 진행하며 로컬 재료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일본의 해초들도 소개하기 시작했다. 해초의 이로움이 널리 알려지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나에게 익숙한 재료가 유행에 휩쓸릴 걸 생각하니 조금 짜증이 났다. 또 다른 재료를 생각해야 하나 싶었다. 비건으로 요리를 할 때도 재료야 정말 다양해질 수 있지만, 해초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려고 고민을 하던 중이라 더 씁쓸했다. 다른 가능성을 가진 재료를 생각해야 할 것만 같았다.


또 해초 비빔밥을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올릴 때, 비빔밥에 들어갔던 과일 펄 레시피의 창작자를 태그 했는데, 일주일 뒤 그가 자기 포스팅에 해초 샐러드를 소개했다. 반가우면서도 미묘하게 쓴 마음이 올라왔다. 


‘그래 뭐 해초가 내 것도 아니고, 고기 말고 해초가 유행하면 좋지!’라는 마음 50퍼센트, 그리고 은근한 씁쓸함이 50퍼센트였다. 


해초가 정말로 곧 유행이 될 것 같았다. 나에겐 익숙한 재료, 오래된 재료인데 그걸 쓰자니 유행을 쉽게 따라가는 사람이 된 것 같고, 또 안 따르는 것도 포모가 오는 듯 해 고민을 한다. 근데 또 생각을 하면 웃긴 일이었다. 나 좋아서 하는 일을 이렇게까지 피곤하게 바라봐야 하는 게 말이다. 


이런 피곤함은 나의 위치를 새삼 자각하게 한다. 나는 애를 써도 유행을 따라가거나 유행을 거부하거나-그래서 포모를 겪거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런 식이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는 손쉬운 연결을 제공해 주고, 트렌드를 접할 기회를 언제나 열어두지만, 사실 무력한 한 개인이 이 시대에 실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유행은 빠르게 퍼진다. 또 일단 퍼진 유행을 무시하며 살기란 어렵다. 위스키나 전통주부터 심지어는 미니멀리즘까지 유행하는 시대, 일도 해야 하고, 어른으로 기능하기만 해도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나는 이제 밀려오는 유행들까지 신경을 쓰고 살아야 한다. 유행을 항상 따라가지 않더라도 그걸 의식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모든 유행들이, 그리고 유행을 따르는 행위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빠르게 오가는 유행들 사이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정말로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종종 잊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유행을 적극적으로 따라가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모르는 척하지도 않는 애매한 위치에 있다. 유행 중에는 내 가치관,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골프 같은 것.


반면에 위스키 같은 경우에는 유행이 되기 전부터 좋아했고, 그래서 그런지 위스키 유행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나저러나 힘든 건 마찬가지다. 기껏 쌓아온 취향이 유행이라는 말에 가려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유행을 따라가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주고 취향을 쌓고, 돈을 주고 유행을 따라가고.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돈으로 못 하는 게 뭐야? 없다. 없는 것 같다. 상황이 이러니 유행을 따라가든 따라가지 않든 여러모로 스트레스가 생길 수밖에.



유행뿐만이 아니라 관계에 있어서도 이 두려움은 이상한 역할을 수행한다. 더 나은 기회, 더 나은 만남이 있을까 봐 두려워지면, 지금 내 앞에 놓인 관계에 집중하는 게 힘들어지기도 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포모를 겪고 있진 않겠지만, 나는 겪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포모 이외의 다른 두려움들-도 삶에 산재하고 있고, 두려움에 잠식된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


자극이 범람한다. 무언가를 쫓고, 또 쫓고, 하면서 나의 현재는 사라진다. 여전히 자극을 완전히 놓을 수 없다. 열심히 요리를 하면서 나름대로 삶에 집중하려고 해도, 요리에도 트렌드가 있어서, 그걸 안 해보면, 안 먹어보면, 모르면, 뒤쳐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내 작은 요리와 요리 자체가 주는 기쁨과 맛이 끝나기가 무섭게 뭔가 새로운 걸 해봐야 한다는 압박감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제 나는 지쳤다. 결국엔 내 작은 끼니를 챙기는 것 마저도 내팽개친다. 그리고 계속 질문한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 수많은 유행과 두려움, 압박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모두 괜찮은 걸까. 내가 이상한 거야?



그 와중에 내 몸이 일주일 전부터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간소하고 단순한 음식 먹고 싶지 않니?’


유행하는 음식들과 재료들, 화려하고 예쁜 요리들, 많은 조리가 필요한 요리들도 좋지만, 간단하게 차릴 수 있는, 단순하지만 조화로운 맛의 한 끼가 간절했다. 내 정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내 몸도 원한다는 걸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건이 된 뒤에 더욱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있다.


간소하고 신선하고 질리지 않는 음식 하면 쌈밥이 떠오른다. 원래도 좋아했지만 비건이 되고 더욱 자주 먹었던 음식이고, 비건으로 근육량을 키워보겠다고 식단 조절을 할 때도 꼭 한 끼는 쌈밥을 먹었다. 


비건 쌈밥도 복잡해지고자 하면 복잡해지겠지만, 정말 간단히 준비할 수 있다. 적당량의 신선한 쌈채소, 쌈장이나 된장, 구운 버섯이나 두부, 템페와 밥만 있으면 된다. 정말 귀찮을 땐 버섯이나 토마토, 당근 등 여러 채소를 넣은 밥을 짓고, 그 밥과 쌈채소, 쌈장, 김치 정도만 먹는다.


계속 쌈밥이 떠올라 오늘 오전에 작정하고 쌈밥을 해 먹었다. 때마침 엄마가 신선한 명이를 사서 나눠줬고, 아빠가 밭에서 정성스럽게 기른 쌈채소들이 연한 잎을 내미는 계절이라, 연하고 부드러운 쌈채소도 운이 좋게 먹을 수 있었고, 양배추도 조금 쪄서 준비했다. 




실체가 없는 두려움에 휩쓸려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나서는 일 말고, 그래서 마침내 텅 빈 나를 마주하는 공허한 밤들 말고, 일단 지금은 새로운 자극을 쫓지 않는 끼니, 그 끼니가 주는 조용한 순간을 단순한 쌈밥과 함께 누리고 싶다. 


아삭거리는 신선한 잎채소, 짭짤하고 감칠맛 나는 호두잣쌈장, 대저 토마토와 서리태, 현미와 귀리로 지은 밥, 기름 없이 잘 구운 표고, 시원한 비건 김치를 한 곳에 두고 잘 싸서 입 안에 넣으면, 이렇게나 다른 것들이 요란을 떨지 않고도 손쉽게 하나가 된다. 


신기한 일이다. 그냥 몸의 소리를 듣고 차린 단순한 끼니가 사소한 용기가 된다. 사소한 용기라 금방 무너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은 무언가를 쫓지 않고도, 쫓기는 기분을 느끼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딱히 건전하고 홀썸한 삶을 살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무언가를 쫓지 않고, 바깥세상은 의식하지 않고 먹는 한 끼도, 그렇게 보내는 한나절도, 꽤 나쁘지 않더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쨌든 나는 계획한 대로 해초로 만든 쌈밥도 곧 해 먹을 거다. 해초가 유행이든 아니든, 홈메이드 초장을 더해 오도독거리는 해초와 밥을 내 몸이 원하니까. 별 거 아닌 이 쌈밥이 “유행이거나 말거나”라고 생각할 여유를 준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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