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첫 번째 독립출판물을 완성하고 지금은 차기작을 작업하고 있다. 겨우 두 권째 작업이니 내가 이 분야의 대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초보가 아니라면 경험할 수 없는 다채로운 시행착오 덕분에 이때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한 깨달음도 얻고 있다. 잊어버릴까봐 여기에 기록해둔다.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마무리짓지 않고, 세상에 내놓지 않으면 그건 작품이 아니다. 개인에게 좋은 경험이라던가, 성장의 자양분이 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꼬리표로서 활용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 마음에 쏙 들 정도로 완벽하면서도 완성된 작품은 이상에 가까우니 완성이라도 하자. 창작하다보니 진짜 그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 한참 진행하다가도 갑자기 너무 이상해보이고 또 너무 멀리 온 것 같아서 처박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잦다.
처음 계획한 것보다, 나의 머릿속에서 그렸던 것보다 훨씬 부족해보이는 완성작이 나왔어도 그걸 '완성했습니다'하고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진짜 어렵다. <지워지는 나를 지키는 일>을 만들다보면 '이걸 내가 세상에 내놓겠다고?' '돈을 받고 이걸 팔겠다고?' 하는 자괴감에 자주 시달렸다.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예약 판매라는 걸 시도한 것 자체가 나에겐 엄청난 용기였고, 그 기분을 지금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작품은 전에 맛보지 못한, 매번 새롭고 짜릿한 두려움을 동반하고... 난 또, 또 용기를 내지 못할까봐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에겐 나의 집필 과정을 꽤 가까이 지켜보고 있는(=그냥 '오늘 작업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날 작업한 내용 일부를 캡처해서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한 관계인) 동료들이 있다. 작년엔 출판 자체가 처음이다보니 그런 인적 관계라던가 자원이 전혀 없었었지. 올해에는 주변에 의지해서 용기를 내보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난 이전에는 하루치 작업을 마치고 나면 자고 일어나서 다음날 그 다음을 바로 이어서 작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어제 5만큼 했으면 오늘 5를 더해서 10을 만들고, 그걸 몇 번 더 반복해서 차곡차곡 100을 만들면 작품이 짠~하고 탄생할거야! 뭐 이런 믿음. 아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제 분명 5를 했는데 오늘 일어나보면 그 5가 갑자기 무쓸모한 것처럼 보인다. 뭐도 마음에 안들고, 어제 보지 못한 구멍들이 막 보이고. 그럼 그걸 다시 0으로 만들어서 어제와 동일한 시작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며칠 동안 힘겹게 30을 쌓았는데, 오늘 갑자기 그게 0으로 돌아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 거기에서 정신적 타격을 입으면 시작점이 -10 정도로 더 밀리기도 한다.
이걸 알게된 뒤로 '매일 에세이 꼭지 1개씩 쓰기' 이런 목표는 세워도, 그걸 n번 반복해서 꼭지를 n개 모으겠다는 단순한 계산은 버렸다. 대신 뒷걸음질 칠 수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서 계획을 좀 더 느슨하게 세우고, 실제로 후퇴하게 되더라도 너무 큰 자괴감을 느끼려 하지 않는다. 그것도 다 창작의 과정이다. 그 과정을 멀리서 보면 앞으로, 뒤로 오가기만 하는 것 같은게 사실은 나선을 그리면서 천천히 상승하는 모양일 것이다. 계단이 아닌 나선이다. 꼭 기억하자.
뒤로 갈수록 점점 어그로가 강해지는 것 같은데 나는 진심이다. 양과 질 모두의 측면에서 창작은 넣은 시간에 비례해서 충실한 결과를 내놓지 않는다. 어떤 날에는 갑자기 글이 술술 써지고, 반대로 어떨 때에는 일주일 동안 두 줄도 못 쓰고 그 두 줄마저 다 지워버리고 만다. (3번에서 말한 나선형 성장과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창의적인 작업은 진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누군가 내게 구몬 학습지를 던져주고 사칙연산 문제를 300개 풀라고 하거나, 예전에 청소 알바를 할 때처럼 닦아야 하는 테이블 개수를 정해주면 나의 성취도를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작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체력, 컨디션, 충분한 인풋 등의 모든 요인을 관리하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다.
그렇게 글을 붙잡고 아무리 울고 불어도 한 글자도 써지지 않다가, 포기하고 드러누워서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걸 몇 번 경험하고 나서는 일부러 '좋은 생각이 찾아오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굉장히 모순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말은 어려워 보이느데, 그냥 작업 관련된 생각을 단 하나도 하지 않고 멍-한 상태로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뜻이다. '내가 이러고 있으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지? 어떤 걸 생각해볼까?' 이런 유혹이 들어도 밀어내고 멍한 느낌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다른 걸 하다보면 갑자기 안 보이던게 보이고 돌파구가 찾아지기도 하더라.
좋은 생각이 찾아올 때에만 충동적으로, 마구잡이로 쏟아내듯이 작업하고 몇 달 동안 쳐다보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되든 안 되든 적당한 주기로 꾸준히 붙잡고 있는 게 나은 것 같다. 물론 개개인의 스타일과 역량에 따라 전자의 결과가 훨씬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모짜르트 같은 천재, 혹은 오랜 시간 동안 쌓인 노하우에 기댈 수 있는 장인들에게나 해당이 있는 말이 아닐까. 지금의 나는 살리에르의 시옷 근처 정도니까, 그런 어떤 예술적 충동이나 요행에 기댈 상황이 아니다. 나를 단련하는 마음으로, 영감이 찾아오지 않아도 글을 어떻게든 써내는 연습을 하면서 그 안에서 전에 모르던 것들을 발견해야 한다.
실제로 이번에 난생 처음으로 청탁 원고라는 걸 작성하면서, 영감을 기다리고 나발이고 마감일에 맞춰서 글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에 부딪혔다. 마감일까지 영감이 찾아오면 다행이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경우에는 두 편의 원고 중 한 편만 수월하게 써지고 두 번째는 그렇지 않았다. 그 원고는 일주일 동안 문단 한 개를 겨우 쓰고 그 뒤로 진척이 없어서 꽤 고생을 했다. 물론 마감일이 코 앞에 닥치니 절박함이 멱살을 잡고 원고를 완성해주었지만, 어쨌든 그때까지 좋으나 싫으나 계속 글을 붙잡고 있었던 덕분에 내가 글이 써지지 않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번째 글은 평소에 나에게 익숙했던 글의 구성, 전개 방식 등에 기댔기 때문에 쉽게 써졌지만, 같은 책에 실릴 두 번째 원고에서 그걸 반복할 수 없다보니 벽에 부딪힌 거였다. 아마 그냥 나를 위한 글이었다면 안 써진다는 이유로 글을 내팽개치고 잊어버렸을텐데, 안 되어도 계속 시도해보니까 이런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좋은 글을 읽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주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나의 식견은 넓어지지 않는다. 이걸 알게 된 뒤로는, 당장 하고 있는 작업과 큰 관련이 없어도 꾸준히 영화를 보고 전시를 다닌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풍성한 재료를 모아서 뜻밖의 순간에 그걸 꺼내서 쓸 수 있게 되더라.
언제나 그렇듯 배우는 건 많은데, 정작 실천하는 건 배운 걸 따라가기에 한참 멀었다. 뭐, 하다보면 되겠지. 내일도 글을 써야겠다. 안 써져도, 잘 써져도, 계속 써야지. 그래야만 내 자신을 창작자라고 부를 수 있겠지. 이런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