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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옥 Oct 08. 2023

너는 맘대로 쓰거라, 고치는 건 내가.. 어떻게 해볼게

독립출판물 <깍두기> 제작기 #04. 편집 (2)

(오프닝을 대체하는 딴소리) 이전에는 주 1회씩 메일링 서비스에서 연재했던 정도의 분량을 격일로 뽑아내니까 슬슬 힘에 부치네요.. 이제 겨우 절반 왔고 꼭 완주하고 싶기 때문에 앞으로는 힘을 좀 빼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이번 글은 실무적인 얘기다보니까 의도적으로 재미를 곁들였어야 했는데 그걸 할 힘을 빼버리는 바람에 좀 재미는 없습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지난 글에서 본격적인 편집 얘기를 하려고 했다가 북페어랑 내 책(?) 관련 에피소드에 심취해서 딴 길로 새 버렸다. 그래서 오늘은 약속한, 어떤 과정으로 편집을 했는지 설명해보려고 한다. 참고로 난 전문 편집자가 아니므로 그냥 이렇게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가볍게 참고만 해주길.


초고가 완성된 상태에서 전반적인 편집 과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대략적인 덩어리 나누기

2. 각 덩어리별 원고에 우선순위 매기고 빼고 싶은 원고 협의하기 (with 작가)

3. 덩어리의 배치 결정하기

4. 글 고치기

5. 또 고치기

6. 또 고치기… 그리고 또 고치기… 그리고… 그리고 또 고치기… 그리고… (무한루프)


같은 글을 또 읽고 또 읽으면 갑자기 다 똑같아보이고 글슈탈트 붕괴가 온다


요약을 하면 그냥 ‘피 토할 때까지 계속 고친다’이긴 한데, 이런 소리를 듣고 싶어서 이 글을 읽고 계시지는 않을 테니 각 단계별로 보다 친절한 설명을 보태어본다.


1.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대략적인 덩어리 나누기

초고를 받아서 처음으로 읽을 때에는 고칠 부분이 보여도 바로 고치지 않는다. 일단 그냥 읽는다. 계속 쭉쭉 읽는다. 그렇게 가볍게 훑듯이 2, 3회 정도 읽으면서 어떤 주제들이 등장했고, (만약 작가의 의도대로 배치되어 있다면) 어떤 순서대로 되어있는지 파악한다. 다만 <깍두기>의 경우 작가님께서 각 원고는 물론 원고 간의 순서도 모두 의식의 흐름대로 결정하셨고, 재배치를 할 전권을 내게 맡겼었기 때문에 해당이 없었다. 


앞선 글을 읽었다면 아시겠지만, 작가님이 A4 기준으로 100페이지가 넘는 글을 썼기 때문에 가볍게 두세 번 읽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그런 노고를 들인 보람이 있다. 머릿속에 소재 전반이 쭉 나열되고, 반복해서 읽으면서 서로 관련이 있는 소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판단이 서고 나면 전체 원고(소재)를 몇 개의 ‘덩어리’로 분류한다. 대충 대분류 같은 건데, ‘독자가 이 책을 왜 읽고 싶어 할까? 책, 혹은 작가에게 궁금한 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답변할 수 있을까?’를 기준으로 삼는다. <깍두기>의 덩어리는 대략 아래와 같았다:


1부: 작가의 배경과 한국에 정착한 이유 소개

많고 많은 나라 중 왜 한국에 왔는지, 잠깐 스쳐 지나갈 생각으로 왔던 나라에 눌러앉게 된 이유가 중심이 되었다. 일단 독자들이 ‘재한 외국인’이라는 작가의 특수성에 대해 호기심을 느낄 것 같아서, 그 질문부터 답변하면서 책을 시작하고 싶었다. 분류하는 과정에서 작가님이 정착한 이유의 일부(아닌가 전부인가…)에 해당하는 결혼(식) 이야기도 들어갔다. 


2부: 외국인으로서 경험하는 한국 이야기

책 제목처럼 한국에 살면서 자신을 ‘깍두기’로 느낀 순간들이 주가 되었다. 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열심히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실수를 연발하면서 발생한 에피소드, 혼자서 자전거 국토종주를 하면서 서울 밖에서 했던 낯선 경험 등을 여기에 넣었다. 이 책의 정체성과도 다름없는, ‘깍두기’라는 제목의 원고도 여기에 들어간다.


3부: 한국과 영국의 차이점

영국이라는 타지에서 나고 자라 한국을 경험하면서 발견하거나 관찰했던 차이점을 다룬다. 2부와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3부에서는 자신이 한국의 사회 현상을 바라보면서 느낀 점을 관찰자의 시선에서 의견을 기술하는 게 많다. 처음에는 2, 3부 구분 없이 하나의 덩어리로 합쳤다가 너무 길어져서 이렇게 세부 기준을 가지고 다시 한번 나누게 되었다.


4부: 앞으로의 계획

자연스럽게 책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앞으로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싶은 미래에 대한 글을 마지막에 배치했다. 작가의 모국인 영국에 작별을 고하는 제목의 원고도 있다. 다른 대분류에 비해 분량이 많이 적기는 하지만, 분량 밸런스를 억지로 맞추는 것보다는 전반적인 구조를 탄탄하게 짜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다른 파트와 굳이 합치지 않았다.


실제 목차에도 처음 나눴던 덩어리가 거의 유사하게 반영되었다.


2. 각 덩어리별 원고에 우선순위 매기고 빼고 싶은 원고 협의하기 (with 작가)

덩어리를 나눌 때에는 일단 그 어떤 원고도 제외하지 않고, 최대한 대분류에 맞춰서 전부 다 배치하려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애매한 짤막한 글들은 일단 ‘기타’에 넣어놓고 넣을 곳을 새롭게 찾아보거나 삭제하기로 했다. 그리고 분류를 마친 글 중에서도 우선순위를 매겨서 넣을 것과 뺄 것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주로 탈락한 원고는 주된 주제와 큰 관련이 없거나, 전반적인 분량 때문에 잘라내야 하는 원고들이었다. 각 꼭지별 분량 편차가 꽤 큰 편이라, 아주 짤막한 토막글들은 보다 긴 글들 사이에 끼워 넣어 감초 역할을 해줄 수 있을 만한 걸 몇 개 선별해 자투리 에피소드로 남겨두기로 했다. 근데...



(쒸익... 내 소중한 글을 왜...)


예상한 것처럼 작가님께서는 내가 원고를 상당히 많이 덜어내려는 것에 대해 썩 만족스러워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공들여서 쓴 글이고, 각각의 원고를 통해서 전달하려고 했던 작가의 생각과 의도가 있는데, 내가 칼을 휘두르면서 슥슥 잘라내니까 속상했을 수 있다. 당연히 마음 같아서는 나 역시 살리고 싶은 글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책의 판형이나 두께를 생각하면 모두 넣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설득했다. 


그리고 편집자의 시선에서 봤을 때 책의 주된 주제에서 지나치게 많이 이탈하거나, 사적인 일기에 가까워서 읽는 사람이 ‘그래 네가 재밌어했다는 건 알겠는데, 이걸 내가 왜 읽어야 하지?’라는 의문을 들게 하는 글은 내가 읽기에 아무리 재밌어도 과감하게 뺐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에세이, 특히 일기처럼 일상을 중심으로 기술한 에세이는 주제가 너무 산만할 경우 독자들이 이걸 대체 내가 왜 돈을 주고 사서 읽어야 하는지 설득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경계에 선 이방인의 시선’이라는 대주제에 최대한 충실하게 원고를 배치하고, 삭제했다. 


다행히도 작가님께서 나의 설득을 잘 받아들여주셔서, 보다 세밀한 편집 대상이 될 원고 리스트를 비교적 빠르게 확정할 수 있었다. (설득 과정에서 물리력을 발휘하지는 않았지만,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십분 활용해서 “그냥 내 안목을 믿어라.” 이러면서 무작정 밀고 나간 것도 없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호호…)


일단 함 믿어봐


3. 덩어리의 배치 결정하기

설명의 편의를 위해 위에서는 실제 책에 반영된 1-4부 순서대로 덩어리를 소개했지만, 당시에 작업을 할 때에는 이런 순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임의로 나열했었다. 나눠놓고 보니까 책의 몸체이자 주된 본론 역할을 하는 2, 3부(현재)가 중간에 들어가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시간 순서에 따라 1부(과거)와 4부(미래) 순서대로 배치하게 되었다. 모든 원고를 엄격히 시간 순서에 맞춰 나열하지는 않았지만(책의 주제 특성상 그럴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작가님 역시 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위해, 커다란 흐름은 과거-현재-미래 순에 맞춘 것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편하고, 완성된 책을 보니 밸런스도 잘 맞는 기분이라 잘 한 선택인 것 같다.


4. 글 고치기. 또 고치기. 또 고치기…

이제부터는 윤문의 영역이다. 이 시점에는 보통 이런 걸 중심으로 검토한다:

- 전체적인 글의 흐름: 논리성, 가독성 등 (A 주제에서 갑자기 B 주제로 튀지 않는지, 주장-근거 구성일 경우 근거 등장 전에 주장만 하염없이 길어지거나 근거가 부실하지 않은지, 강조가 되어야 하는 소재에 강조에 필요한 만큼 적절한 분량이 배치되었는지 등)

- 문단, 문장, 단어 간 연결이 자연스러운지

- 중복되거나 불명확한 표현이 없는지

막 엄격하게 기준을 적어놓고 비교하면서 고치는 건 아니고, 그냥 읽으면서 직관적으로 ‘이건 좀 이상하다’ 싶은 걸 수정하는데 그 과정을 돌아보면 대충 위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 같다. 



일주일을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검토해야 하는 초고가 굉장히 많아서 2주 정도 걸렸다. 그렇게 윤문 과정을 충분히 많이 거치고 나서 더 이상 손댈게 거의 없다는 확신이 드는 시점에서야 맞춤법 검사기를 돌리고… 원래대로라면 거기서 원고는 끝, 디자인으로 넘어가면 되겠지만 나에겐 번역이라는 또 다른 산이 남아있었다. (그렇다. 초고가 영어니까 당연히 편집도 영어로 진행했다.) 그 산은 한 번도 넘어보지 못한 아주 낯선 산. 그 산이 얼마나 험준했는지는…


-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깍두기>는 10월 말부터 전국 독립서점을 통해 판매할 예정입니다. (지역 서점과의 상생을 위해 개인 통신판매, 대형/온라인 서점에서 유통할 계획은 없습니다.) 다만 서점에 입점하기에 앞서, 인쇄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먼저 예약 판매를 진행합니다. 독립 창작자와 1인 출판사의 작은 목소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책을 예약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깍두기> 예약 판매 주문하기 (~2023. 10. 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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