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로부터』류현재 , 마름모, 2024.01.22.
‘에잇. 편집자나 될 걸 그랬어.’ 책을 읽다가 동어반복이 되면 어느 순간부터 그 단어에 집착하며 개수를 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란다. 물론 편집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만 말이다. 일부러 작정하고 찾는 건 아니지만 자꾸만 그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류현재 장편소설 ‘온기로부터’를 읽고 나니, 이상하게 다른 책 속의 ‘온기’라는 단어가 보인다. 다들 온기 타령인 걸 보면, 주인공의 이름을 잘 지은 건가?
드라마 공모전 준비로 출산예정일이 지났다는 것도 몰랐던 엄마 덕분에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염세적인 세계관을 가졌다고 말하는 온기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친구들과 랩을 만들어 부르며 우정을 나누고,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배우는 고등학생 온기의 성장소설이지만, 온기의 이야기이기만 했다면 퍽 시시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글이란 똥과 같아서 안 싸면 죽는 거’라고, ‘잠잘 때마저도 작품 속에 사는 게 작가’라고 말하는 드라마 작가 온기의 엄마, 지율리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책상 위 모니터 옆으로는 엄마가 붙여놓은 메모지들이 가득했고, 그 앞에 어린 시절 내 사진이 있었다. 웃고 있는 얼굴이 아니라 울고 있는 모습이었다. 엄마가 날 혼자 두고 집을 나갔을 때였던 거 같다. 엄마가 왜 하필 우는 사진을 붙여놨는지 그땐 몰랐다.”
온기 엄마가 어렸을 때, 온기의 할머니는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가 사진작가를 알게 되었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 남자와 살고 싶어서 함께 떠나려고 짐을 챙겨 집을 나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가게 앞에는 아홉 살짜리 엄마가 와 있었다. 왜 왔냐고, 집에 가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울고 서 있었다. 엄마가 영원히 그 자리에 서서 울고 있을 것 같아서 결국 할머니는 떠나지 못했다. 울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찍어 그 남자에게 보내고, 한 장은 할머니의 지갑에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자식의 우는 얼굴 앞에서 부모는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영원히 울고 있을 것 같은 얼굴로 떠나는 엄마를 붙잡아 둔 지율리. 그녀 역시 자신이 집을 나간 뒤, 혼자 남아 울고 있던 온기를 찍어둔 사진으로 살아 낼 힘을 얻었던 것은 아닐까. 아빠는 엄마 때문에 평생 불행했을 거라며 엄마를 원망하지만, 이혼한 뒤 엄마 곁으로 이사 왔다. 하루가 멀다고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엄마가 좋아하는 사골국을 끓인다. 으르렁거리면서 싸우는 것이 서로의 외로움을 덮어주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두 사람은 각자의 강을 흘러가며, 각자의 방식으로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린 모두 각자의 강을 흘러간다. 강마다 물줄기도 다르고 흘러가는 지점도 달라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홀로 흘러가다가 간혹 합류 지점에서 만나면 그저 반갑게 손 흔들어주거나, 우리 할머니와 엄마처럼 싸움으로 서로 위로하거나, 잠깐의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나의 강을 타고 사는 것이다.”
내가 아는 M은 어린 시절 부모의 잦은 다툼을 볼 때마다 심하게 엄마를 다그치는 아빠를 증오했고, ‘나는 나중에 결혼해서 절대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 부모가 싸우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지 않겠어.’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M은 결혼한 지 십 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그래도 아이를 낳아 보라고, 부모가 되어 보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말은 어쩌면 섣부른 조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율리가 어린 자식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가려다 들킨 엄마를 용서했다고, M도 아버지가 돼보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해하면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애초부터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함부로 용서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깊게 새기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의 조언은 너무 하찮고 싸구려 같다. 가족이니까, 잘 아는 사이니까 당장 속 편하자고 아무 생각 없이 급매 상품처럼 용서를 권한 내가 몹시 부끄럽다. 용서라는 이름으로 감싸 줄 수 없는 일은 어디에 남겨 두고 살아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