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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솔티 Nov 10. 2018

혼자왔어요 : 사랑해 실험

"사랑해" 라는 말의 기호를 실험을 통해 경험하다.

시니피앙 그리고 시니피에 [signifiant, signifié]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는 기호란 분리 가능한 두 개의 요소, 

즉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기호 속의 발음을 시니피앙, 그 발음에 의해서 생기는 관념적 내용을 시니피에로 간주하였다.



몇 년 전 초 겨울, 당시 만나던 애인과 "사랑해" 라는 말 자체에 의미가 있을까? 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이 너무 달라 실험을 했다.

실험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H와 내가 함께 술집에 들어간다

2. H가 지명한 사람에게 다가간다

3. ‘나’는 정말 아무 의미 없이 낯선 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4. H는 그것을 보고 느낀 감정을 후에 말한다.  

   

총 4개의 단계를 가진 간단한 실험이었다.


실험자와 피실험자 역할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정해졌다.     

"사랑해" 말은 말 자체에 특별한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 는 실험자가 되었다. (시니피에)  

"사랑해" 말은 단순한 기호이고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H>가 피실험자가 되었다. 

(시니피앙)

사랑이란 말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인식할 뿐이고, 실험자가 만약 거짓으로 사랑해라고 타인에게 말한다면 H는 마음이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고.


우리는 실험을 위해 합정역 근처 번화가의 한 술집에 들어갔다. 

내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 앉자 몇 분 뒤 H가 따라 들어왔다. H와 나 모두가 처음 가보는 술집이었다. 내가 주문한 진토닉이 나오자 H의 문자가 왔다. ”네 왼쪽 옆 자리에 혼자 앉아있는 남자“ 우리의 표본이 정해졌다. 

평소와 다르게 이모티콘도 애교스러운 말도 없는 H의 문자는 나를 떨게 했다. 

또한 우리의 실험은 표본1인 이 남자에게 나쁜 짓이었기 때문에 아래 속눈썹부터 몸은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H 그리고 표본1 모두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H가 지켜보는 

앞에서, 바짝 힘을 주고 낯선 이에게 말을 걸었다. 


"왜 혼자 계신지 물어봐도 돼요?"  

그렇게 실험을 시작했다.

 



"글쎄요, 오늘은 혼자네요"  표본1은 웃으며 대답했다. 

접근은 성공적이었다.


실험자(나)는 목표인 "사랑해" 라는 말의 개연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 표본1에게 열심히 말을 건넸다. 

자세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그때 실험자(나) 극도로 긴장했던 것이 맞다.

어디 사냐는 뻔한 말이나, 이곳에 자주 오냐는 그런 참 쓸모없는 말들뿐이었다. 

평소 실험자(나)가 우습게 여기던 남자들의 픽업 라인들을 그대로 뱉으며 실험자(나)는 드라마를 좀 더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실험자(나)가 어설픈 추파를 던지는 동안, H는 실험자와 표본의 뒤에서 위스키를 들이키며 긴장한 티를 내고 있었다. 표본1은 수상하게 자신의 쪽을 힐끔거리는 H를 눈치 채지 못했다. 

눈치 채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그는 주말 밤 자신에게 접근한 젊은 여성에게만 온통 집중하고 있었다. 

    

실험자와 표본1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는 실험자가 탱커레이 NO.10 토닉을 3잔쯤 먹었을 때쯤 이였다. 

실험자는 표본 1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적당히 오른 취기는 상대의 눈을 쳐다보는 것을 쉽게 만들었다. 

죄책감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가는 이 실험을 그만두라며 말렸어야 했지만 

그러나 실험자(나)는 "있잖아요, 이상한 말이지만 저 그쪽 사랑하는 것 같아요."      

실험을 시작해버리고 말았다. 

실험은 세 가지 이유로 정지되었어야 했다. 


사랑을 믿고 있을지도 모르는 한 인격체에게 사랑을 총알 삼아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실험자가 뼛속까지 사랑해라는 말의 의미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도 제가 이상해 보이는 거 아는데요, 근데 이거 사랑인 것 같아요! 저 그쪽한테 첫눈에 반한 것 같아요! 혹시 사랑해봤어요? "

마지막으로 인간은 첫 도둑질을 어려워하지 두 번째 도둑질부터는 겁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실험자는 거짓 사랑 고백에 죄책감을 가진 사람 치고 너무도 쉽게 두 번째 거짓말을 했다.


표본 1은 두 번째 사랑고백을 들은 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입술 끝을 삐죽거리며 웃었다. 안타깝게도 그 순간 그의 눈빛은 너무 선했다. 그가 방금 전까지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대도 방금의 사랑고백을 들은 후엔 사랑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선했다. 

(그래서 차라리 그때 표본이 실험자를 이상한 사람 보듯 쏘아보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오래도록 생각하고 있다.) 


실험자는 두 번째 질문 이후 실험에 완전히 집중하였다. 하필 실험자는 뼈속까지 시니피에를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말에는 에너지라는 게 있다는 딱 부러질 듯 하지만 사실은 몽매한 실험자의 생각은 실험의 훌륭한 윤활제가 되어주었다. (실험 노트 1. 첫 번째 사랑고백에서는 맹세코 사랑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사랑고백과 동시에 실험자는 표본에게 무언가 훅! 쏟아지는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H와 이별하기 전까지 표본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을 실험자는 고백하지 않았다.)

 

실험자는 표본 1의 표정과 말을 구체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표본1은 실험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서 만났다면 진짜로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만큼 근사한 모습이었다. H와 비교되는 큰 키, 캐주얼 한 차림으로 나를 만나던 H와 비교되는 단정한 정장, 그에 맞게 다듬은 정갈한 머리, 낮은 목소리와 느릿한 말투 나이에 비해 고운 피부와 높은 콧대를 따라 잘 뻗은 코 선 뭉툭한 콧망울 살짝 앞으로 트여있는 아랫입술 웃을 때 보이는 입동굴과 가지런한 아랫니들 또..... 내가 그렇게 표본1에게 빠져들고 있을 때 H는 위스키를 한잔 더 주문했다. H는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았지만 그 순간엔 술이 꼭 필요했다고 한다.    

"그쪽은 사랑을 믿으시나 봐요?" 표본이 실험의 근간을 건드리는 질문을 던졌다. 

H는 새 위스키 잔을 받아 들었다.


<H의 입장> 

사랑한다는 말은 영어로 I love you. 하지만 '아이 러브 유'가 사랑해라는 말을 뜻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으니, 한 외계인이 지구에 찾아와 외계어로 사랑한다는 말인 "오오옷!"이라는 말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이 아무리 진정으로 사랑해서! "오오옷! 오오옷!"이라고 말하더라도 우리는 "오오옷!"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고  "오오옷!"이 사랑한다는 뜻인지는 평생 모르거나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나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우리는 그들의 사랑을 못 느끼지 않겠는가? "오오옷!" 따위 알게 뭐람     

그러니 "사랑해"라는 말은 외계까지 가지 않고도, 한국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어느 나라에 가는 순간 그건 전혀 "사랑"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실험은 나의 연인이 타인에게 오늘은 "오오옷!"이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내가 사랑해라는 말을 외계어로는 "똥방귀나 먹어라"라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나도 그녀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랑해는 그저 "똥방귀나 먹어라!"가 되는 것이다. 

나는 위스키를 한잔 주문했다.

술을 잘 하지 못하던 내가, 소주를 세잔이 최대 주량인 내가 주문한 술이 하필 위스키인 이유는 음. 그게 가장 있어 보여서. 그래서 그런 것 같다. 실험자에게 실험을 시작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살짝 떨렸지만 나보다 더 떨고 있는 실험자를 보니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무서워해서 혼자서는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 못 시켜먹는 실험자인데, 참 열심히 의지에 찬 표정을 짓는다. 

실험자가 표본 1에게 다가갔다. "왜 혼자 계신지 물어봐도 돼요?" 참, 실험자다운 첫 말이었다. 너무 무례하지도 그렇다고 올곧게 예의 바른 물음도 아니었다. 

실험자는 자리에 앉아 표본1의 술에 대해 물었다. "이건 무슨 술이에요?" 딱 봐도 와인인데. 그건 대체 왜 묻는지. 하지만 그녀가 묻자 표본1은 그 와인에 대해 참 열심히 실험자에게 설명한다. 표본1의 느끼한 머리와 정장이 기름졌다. 그리 비싸지도 않은 시계를 차고서는 있은 체 하는 걸 보니 실험자는 절대로 표본1에게 사랑에 빠지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표본1을 오늘의 실험 도우미로 고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험자는 표본1에게 어디에 사냐는 질문과 동시에 이 먼 술집까지 자주 오느냐고 물었다. 표본1은 자주 오지는 않지만 자주 오게 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 저런 후진 멘트나 치는 새끼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하기 참 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험자가 두잔째인 진토닉을 모두 마셨다. 실험자의 귀가 빨개져있다. 실험자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알기 힘든 변화이다. "한잔 더 드실래요? 진토닉 되게 좋아하시나 봐요" 표본1이 실험자에게 물었다.     

그녀보다 술을 더 못하는 나는, 그 질문 즈음 주문한 위스키를 다 마셨다.     

세 번째 진토닉이 실험자의 앞에 놓였다. (실험노트2. 그때 나는 실험자가 세 번째 진토닉을 다 못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실험자는 친밀한 사람과 있을 때만 술을 먹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표본1은 실험자에게 이름과 나이, 사는 곳, 학교 그리고 좋아하는 음식과 반려동물 여부, 또 부모님과 같이 사는지 (아니 도대체 그건 왜 묻지?) 여행을 좋아하는지, 그렇다면 프랑스는 가보았는지를 물었다.

실험자는 실험에 몰두하지 못한 채 표본1에게 자신의 신상을 줄줄 불어댔다.

'대체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 하는 거야?'     

슬슬 지루해지고 있었다.     

그때 실험자가 진토닉 한 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표본1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있잖아요, 이상한 말이지만 저 그쪽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실험이 시작되었다.


실험자(나)는 그 뒤로 거침없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당황 밖에 못하고 있는 표본1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진짜 사랑을 해보았느냐고 물었고, 정말로 첫눈에 반한 거라고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믿어줄 거냐고 물으며 교태를 부리기도 했다. (실험노트 3. 그녀는 그것이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했지만, 실험과정에서 정말 많은 신체적 접촉이 있었고. 그것은 실험의 규칙을 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쯤 위스키를 한 잔 주문했다.


"그쪽은 사랑을 믿으시나 봐요?"

표본 1은 선한 눈으로 실험자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실험자는 당황했다. 혹시 피실험자와 내가 너무 눈 맞춤이 잦았던 건 아닌지, 몸이 피실험자 쪽으로 티가 나게 틀어져 있던 건 아닌지 급하게 점검했다. 아니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표본이 우리의 관계와 실험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는 생각을 그때는 하지 못했다.) 
 
 "저는 믿어요!" 실험자는 대답했다.

"그래서 진부한 사랑노래나 영화가 좋아요 아직도 세상에 사랑이 남아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잖아요. 그러는 그쪽은 그냥 사랑 말고 진정한 사랑을 믿으세요?" 
"저는 안 믿어요. 세상에 진정하고 순수한 사랑은 없어요"     

지금까지 실실 웃어주던 표본1의 냉소적인 태도에 실험자는 당황했다. 

"그럼 제가 첫눈에 반했고 그쪽을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뇨, 믿어요. 다만 그게 진정한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저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주셔서 너무 고맙지만 제가 생각하는 사랑과 그쪽이 생각하는 사랑의 모양은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

"그쪽이 맘에 안 든다고 거절하려고 하는 얘기가 아녜요. 다만 조심스러운 거죠, 대체 그쪽한테 사랑은 뭘까. 처음 봐요 이렇게 초면인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 저는 아마 아직 사랑 잘 모르나 봐요 하하" 
 (실험 노트4. 실험자는 이때 울고 싶었다.) 
 "제가 좀 경솔해 보였겠네요. 음 근데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

"그래요? 그랬다면 다행이고요, 근데요, 오늘은 그만 사랑해도 되니까 다음에도 저랑 술 한 잔 하고 싶으면 연락 줘요" 

표본은 펜을 재킷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그러자 실험자는 손등을 내밀었다.      

“여기에 적어줘요”

표본은 웃다가, “정말로요?” 묻고 잠시 고민하다가 실험자의 손등에 자신의 번호와 이름을 적었다. 

(010-874.. 이ㅇ현) 그리고 실험자와 본인의 술값을 계산하고 바 밖으로 나갔다. 

표본1은 뒤를 돌아 다시 인사를 하거나 멈칫거리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H는 실험자를 보며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험자의 시선은 방금 밖으로 나가버린 표본에게 있었다.


들어왔던 순서와 마찬가지로 실험자가 먼저 술집 밖으로 나갔고, H는 주문해둔 위스키를 다 마시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술잔을 버려두고는 급하게 계산을 하고 뛰쳐나왔다. 


나와 H는 밖으로 나와 실험의 규칙을 운운하며 조금 싸우고 H는 내 손에 적힌 표본의 번호를 박박 문대 지웠다.그리고 H와 나는 다시는 아무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내가 그를 이긴 것이었다. 하지만 실험은 처음부터 짜임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내가 유리했다.)


몇 달 뒤 H와 내가 헤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 실험에 대해서 아무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H가 어딘가에 글을 적어놓지 않았다면 우리가 한 은밀한 실험은 이 곳에 처음 적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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