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짙은 얼룩

운명이 남긴 흔적

by 아윤


일주일 전 제출했던 이력서가 서류 합격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습관처럼 들어간 채용 사이트에서 업무 핏이 맞는 공고를 발견했지만, 이직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기에 지원 의사는 없었다. 그 후 헤드헌터로부터 해당 공고로 오퍼를 받기도 했으나, 결국 지원하지 않았다.


의사가 없었음에도 이력서를 제출하게 된 이유는,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할머니께서 별세하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편찮으셨으니, 약 25년간 몸이 안 좋으셨던 셈이다. 아픈 할머니를 모시느라 고모와 고모부께서 많은 고생을 하셨다. 어릴 때의 기억 외에는 함께한 추억이 없어 눈물이 나지는 않았으나, 울고 있는 가족들을 지켜보는 것은 마음이 아팠다.


친인척과 평소 왕래가 없었기에 이렇게 모인 게 몇 년 만이었다. 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다.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시간의 공백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함께 모여 슬픔을 나누는 것이 장례일까, 뿔뿔이 흩어져 사는 이들을 한데 모아준 것에 대해 곱씹어 생각했다.


지금 재직 중인 회사는 4 영업일의 경조 휴가를 주는데, 발인을 주말에 하여 3일의 여유가 생겼다. 회사에 불만은 없지만, 엄격한 업무 분위기와 강도 높은 업무에 매일 출근길마다 괴로웠다. 쉬는 게 소원이었으니, 이 3일은 할머니가 남겨주신 선물 같았다.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짐은 간단하게 백팩 하나에 꾸렸으나, 노트북 케이스를 추가로 챙겼다. 사용하지 않더라도 없으면 불안했다.


제주에 도착해 애월 바다로 향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 놓고 노트북 작업하는 걸 어쩌다 행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딱히 할 게 없어서 스치듯 봤던 채용 공고를 다시금 열어봤다. 노트북을 가져온 것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었을까, ‘어차피 불합격할 것’이란 생각을 하며 대충 지원동기를 적어 제출했다.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고, 그저 ‘뭐라도 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여느 때와 같이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사회 의안 자료의 정합성을 검토하는 작업은 글자를 한 글자씩 읽어보는 일이라 눈이 시렸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제출했던 이력서가 서류 합격을 하여 면접 일정을 조율하자는 연락이었다. 곧바로 장례 기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던 막내 삼촌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막내 삼촌은 나와 14살 차이로, 대학시절 가장 많은 고민 상담을 했던 사람이다. 세대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아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업을 한 후에는 연락이 부쩍 뜸해졌다. 오랜만에 다시 고민상담을 청했는데, 삼촌은 ‘이직 생각이 없더라도 혹시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 면접에 다녀와라’라고 하였고, 결국 1차 면접에 합격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운명이 교차하는 걸까. 할머니의 떠남이 남긴 공백은 예상치 못한 만남과 기회로 채워졌다.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으나, 무더운 여름을 기억할 짙은 얼룩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