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가 설원이라면 흑지는 우주 같다.
아이폰에 블랙 모드가 생겼다. 생긴 지 좀 됐다. 아이폰 메모 어플이나 에버노트에 자주 기록하는 나는 이젠 백지에 이어 흑지에도 글을 쓴다. 백지는 눈이 소복이 쌓여 모든 것이 지워진 설원 같다면, 흑지는 별들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 빛이 보이지 않는 우주 같다. 글이 쓰이는 배경은 항상 미지의 영역이고, 무엇인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을 가리고 있는 천막 같기도 하다. 그 안에서 거창하진 않아도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발굴해낸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위를 또박또박 걸어 나가며 하나씩 건져낸다. 글쓰기란 어쩌면 그런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런 고독한 일을 왜 자진해서 하느냐면 나는,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다. 특별한 이유나 사명감으로 글을 쓴 적은 거의 없다.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백지와 흑지 앞에 서게 만든다. 쓰고 싶은 글이 나를 찾아오기도 하고, 마음속에 불분명한 무언가를 직시하고자 할 때도 적으면 좀 나을 것 같아서, 적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쓴다.
하얀 설원이나 공허한 우주는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그런 곳에 덩그러니 있노라면 끝없이 사유하며 무엇인가를 찾으려 들게 되는 건 본능과 다름없지 않을까.
마음속에 백지 하나 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페이지 위에 그렁그렁 맺힌 잉크 방울처럼, 농축된 마음 하나 마음에 고여놓고 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독서 등 불빛 아래 고요히 누워있는 검은 활자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하얀 백지로 와서 젖은 활자가 되어 시로 남는다. 서성이던 그림자와 수없이 반복되는 순간의 장면들이 어른어른 백지 위로 눕는다. 불면 하는 밤하늘 아래 살아있는 시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