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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야 Feb 19. 2020

파일 제목을 날짜로 달지 말자

결국 새벽 2시와 3시 사이, 혼자 글을 쓰는 이 순간에 답이 있었다.

  보통 글을 써야지 생각하고 시계를 보면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글을 쓴다. 만들려고 만든 루틴은 아닌데, 우연히 그렇게 됐다. 그렇다고 성실하게 매일 새벽 2시에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일하고 있던 프로그램이 막바지라 집에서 쉬는 시간이 많아졌고, 쉬다 보면 밤낮이 바뀌는 건 거의 당연한 현상이었다. 자연스럽게 가장 활동적인 시간은 새벽 2시 정도가 된다.


  이걸 써야지!하고 글을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빈 한글 문서파일을 켜놓고, 습관적으로 제목에 ‘20200211’과 같이 날짜를 적어 저장해놓은 뒤 글을 쓰기 시작한다. 반면 이걸 써야지! 마음먹고 한글 파일을 켠 경우에는, 우선 글을 쓴다. 저장할 정신이 없는 거다. 한참 쓰다가 잠깐 틈이 생기면 그제야 저장이 안 돼서 글이 날아가면 낭패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임시로 저장을 한다. 따로 제목을 지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첫 문장이 제목으로 저장된다.


  오늘은 온종일 무력감에 시달렸다. 글은   있을까? 그냥 자는  낫겠다 생각하는 중이었다. 문득 글을 저장해둔 폴더에 문서 리스트를 보는데, 날짜를 제목으로 저장해둔 문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글을 쓰는 나의 답답함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 목적이 없는 . 의도가 없는 . 계획도 없는 . 날짜에는 힘이 없다. 그날 글을 썼다는 증거 정도일까.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파일 제목을 날짜로 달지 말자라는 제목으로 파일을 저장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을 달아두니 그래도 목적과 의도, 계획이 생겨난  같다. … 아닌가.


  사실 이 글의 목적이나 의도, 계획 같은 건 하나도 모르겠다. 그런 것에 가까워질수록 불신과 불안은 커지고, 박탈감과 무력감이 더해진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데, 알아가다 보니 겁이 많아진다. 요즘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한다. 용기를 낸 것, 발을 하나 더 내디딘 것, 욕심이 생긴 것, 다른 세상을 알아가는 것. 아는 게 많아질수록 내가 더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더 작아지고 하찮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폴더에 쌓여가는 날짜로 된 제목들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괜히 더 조급해진다. 그러다가도 급한 마음에 온전치 못한 글을 쓸까 봐 걱정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용기도 없다.


  이런 걱정은 사실 별 영양가가 없다. 답은 그래도 계속 꾸준히 쓰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목적, 의도, 계획이 없는 이 글도 답 없이 쓰이고 있고 결국 답 없이 끝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는데 손 놓고 있을 거 아니라면 이렇게라도 계속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파일을 닫지 않고 쓰고 있다. (사실 닫았다가 다시 켰다) 

  또 한 단계 넘고 보면 나를 바보 취급했던 과거가 한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흘러가는 일에 너무 많은 걱정을 쏟지 않기로 했다. 자존감을 높이려면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데,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 아닐까. 다른 것에 휘둘려서는 나의 글을 쓸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더 유의해야 한다. 이럴 때 길을 잃으면 묵묵히 쓰는 태도를 갖기 힘들어질 것만 같다.


  요즘 글 쓰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다. 항상 글을 쓰면 세 편 중 한 편(어떨 땐 두 편)은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글이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보려고 애쓰기도 했는데, 결국 새벽 2시와 3시 사이, 겨울이마저 잠들고 혼자 글을 쓰는 이 순간에 답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고민을 함께해줄 수는 있지만, 글을 대신 써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앞으로도 계속해서 혼자 있는 순간에 외로움과 걱정을 꾹 누르고 (혹은 글에 섞어서) 쓸 수밖에 없다. 그저 혼자 꾸준히 써나가고, 함께 나눠야겠다고. 나를 더 단단히 하자고 마음먹는다. 시계를 보니 이제 곧 새벽 2시와 3시 사이의 순간이 끝난다. 이런 순간이 나에게 항상 찾아와주기를. 내가 잊지 않고 이 자리를 찾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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