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내려놓고 만난 즐거움
구체적인 수치는 목표를 향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수치에 지나치게 매몰되는 순간, 우리는 종종 본질을 잃는다. 단골 새해 목표인 ‘책 읽기’를 떠올려보면 그렇다. 보통은 1년에 몇 권, 한 달에 몇 권처럼 권수를 목표로 삼는다. 나 역시 목표 달성에 의미를 두고, 마치 미션을 수행하듯 책을 읽었다. 그렇게 한 권을 끝내고 책을 덮었을 때,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무슨 내용이었더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도 내 안에 남은 것이 없다는 느낌. 그 허탈감은 꽤 컸다. 그래도 휴대폰을 덜 봤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볼까. 어딘가에는 기억이 남아 있을 거라는 합리화를 해보기도 했다.
비슷한 경험을 요즘에는 달리기를 하며 하고 있다. 예전에는 30분을 쉬지 않고 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록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10km를 몇 분대에 달리는지에 관심이 쏠렸고, 기록 단축을 위해 애쓰는 날들이 늘어났다. 매일같이 노력하는데도 기록은 좀처럼 줄지 않고, 몸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달리기를 통해 느끼던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앞서면서 ‘오늘은 그냥 쉴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록에 집착한 나머지 무리하면 건강을 잃고, 기록에 도달해야만 성취를 느끼게 된다. 그 과정 자체가 버거워지는 것이다.
그러다 ‘존2 운동법’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그게 과연 운동이 될까 싶어 귀담아듣지 않았다. 운동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그것이야말로 달리기를 오래, 그리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오면 몇 번이고 곱씹어 보고, 책을 덮은 채 눈을 감고 나의 삶과 연결해 보는 것. 책을 끝까지 읽었는지보다, 한 문장이라도 나에게 제대로 닿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 권을 더디게 읽더라도 온전히 나와 이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독서야말로 즐거움이 되고,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취미가 된다.
읽은 책의 권수나 달리기의 기록처럼, 수치로 드러나는 것들만이 전부는 아니다. 진정한 가치는 숫자가 설명해 주지 못하는 곳에 있다. 오버페이스하지 않는 것,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나만의 속도를 아는 것, 수단이나 목표가 목적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 행동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