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과 독서
마치 여름 하늘 속에 그려진 낯익은 길들이 우리를 감옥으로 데려갈수도 있고 순진무구한 잠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는 듯이. - 알베르카뮈 「이방인」, 민음사, p119
티비소리에서, 엄마의 목소리에서, 내 것이 아닌 소음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 안으로 스며들기엔 내가 너무 맨들한 피부였던 것 같다. 선풍기가 돌아가고 엄마가 등뒤에 앉아 티비를 보는 이 방 안에서 나는 자발적으로 매일을 이방인으로 살고 있었다. 아니, 방안에서 뿐 아니라 바깥에 나가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하다거나 보통이라던가 정상이라던가 그런 것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나는 한참 뒤처져있었다. 소음과 더불어 그 사실도 나를 괴롭게 했다.
현실이 괴로울 때 정면으로 돌파하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자주 도망을 택한다. 거의 그렇다. 소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앉은자리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가고 싶어서 소설만 골라 읽었다. 내용에 따라 추운 계절로 가기도, 현실보다 더한 지옥으로 끌고가기도 했지만 이쪽 세계가 희미해지기만 하면 되었다.
이어폰을 껴 소음을 차단하고 벽쪽을 보고 비스듬히 앉는다. 그러면 글자위로 그림자가 지지만 그 정도는 문제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야를 좁히고 상상이 넓게 펼쳐지면 다른 생각은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평소보다 더 다양한 감정과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면 시간이 팽창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완전한 나만의 세상안에 살 수 있었다.
아마도 나는 엄마를 사랑했겠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많게건 적게건 바랐던 적이 있는 법이다. - 알베르카뮈 「이방인」, 민음사, p83
「이방인」엔 세상이 정상이 아니라고 규정짓는 인간이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 무감정한 인간이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여자친구와 잠자리를 하는 동안에도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이렇게 상황을 정리하고 보니 이상한 것 같기도 한데 읽는 동안엔 그저 좀 건조한 사람이네 생각했을 뿐이었다. 나도 감정을 굳이 표현하지 않는 편이어서 그랬나.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또한 모든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비워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을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 알베르카뮈 「이방인」, 민음사, p147
나도 언젠가 자유를 느낄 수 있을까.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매일의 의미를 찾기위해 다른 세상으로부터 한문장씩 가져오는 지금의 나에게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날이 올까?
소음은 어디에나 있다. 소음은 꼭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서 그때 내가 아무리 귀를 틀어막고 청력을 잃게 되었더라도 소음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애초에 나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나조차도 없는 완전한 무음 상태의 진공을 바랐던 거다.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을 바라고 있으니 소설의 세계로 도망칠 수밖에. 그렇게 도망친 공간이 얼마나 넓었고, 까마득한 시간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자유로운 생각을 했는지 기록해두는 것이 그날의 일기였고, 그 시기의 모험담이자 도주로를 표시해둔 지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