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장소를 요구한다.

길위의청년학교 이강휴 이사장(군산휴내과 원장)

by 길위의청년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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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료실이라는 공간에서 매일 8-9시간을 보낸다. 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고 중요한 일을 하는 곳이다. 특별히 직업인으로서 진료실은 정체성과 관련된 장소이고, 존재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곳이다.


토포필리아 (topophillia, 장소애)라는 말이 있다. 중국계 미국인 지리학자인 이푸투안이 언급한 말이다. 그리스어로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pos)에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를 붙인 말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장소와 공간은 구별해서 설명한다. 공간은 추상적이고 장소는 구체적이다.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들 때 그곳은 장소가 된다. 우리의 시간, 돈, 열정, 기쁨, 사랑, 슬픔, 위로를 담아내는 곳은 장소를 통해 일어난다.


우리는 대부분 도시라는 공간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에서 삶을 만들고 일으킨다. 사람들은 도시 안에서, 직장에서, 집안에서도 특별히 자주 가고 특별히 애정을 느끼는 장소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곳은 개인들의 기억과 사건들 속에 의미 있는 감정이 부딪힌 곳이다. 깊은 의미를 주는 장소가 꼭 시각적으로 화려한 곳은 아니다.


1928년부터 1933년 까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새창이다리’는 군산시 대야면 복교리에서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를 연결하는 수탈의 다리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콘크리트 다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수탈의 아픔이 있는 이 다리가 누군가에게는 사랑으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달려가는 다리가 되기도 한다.

장소에는 우리의 삶을 뿌리내리게 한다. 도시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장소나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도시에 뿌리내리기 쉬어진다. 공통된 경험은 함께 속함을 경험하기에 뿌리 내림이 쉬어지고, 깊이 뿌리 내리게 된다. 많은 부정적인 경험들보다 특별한 한 번의 경험이 그 도시를 떠나기 쉽지 않게 할 것이고 그 도시에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게 한다. 지금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도시(도시속의 장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당신만의 특별한 장소가 있는가?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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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시먼은 “삶은 장소에서 일어난다(취한다)”라는 책에서 인간의 삶에서 장소, 장소 체험, 장소 애착이 가지는 압도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장소 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존재감이 없다는 말처럼 슬픈 말은 없는 것 같다. 존재함이란 장소에 있음이다. 존재감이 없다는 말은 없는 존재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장소감이 없다는 것은 존재로서 세계 내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장소에 대한 감각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에 자기 장소 없이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만의 장소를 찾아 캠핑, 사진촬영, 여행 등을 통해 삶을 향유한다.


지금 넷플릭스에서 한창 반영되고 있는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있다. 청소년 시절 학교 폭력을 당한 송혜교가 성인이 되어서도 그 시절의 아픔과 그 시절의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복수를 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약자를 괴롭히기 위해 같은 편이 되었다가 서로 배신하는 모습도 있고, 편이 되어 주는 사람 때문에 복수에 같이 동참하기도 하고, 같은 편이 없어서 홀로 싸우는 것 같지만, 같은 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사람의 편이 되어 싸워주기도하고 싸우지는 못하지만 곁에서 지키는 사람도 있다. 드라마 마지막 즈음에 곁에서 이미 알고 있던 집주인 손숙씨가 송혜교에게 “당신 편이 되어 주는 사람도 있어야지”라고 하는 대화가 나오고, 손숙을 기억하며 “저에게도 좋은 어른이 있다는 걸”이라는 말을 남긴다. 내가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본 것은 상처 입은 자(피해자, 존재감 없는자)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의 곁이 되어 주고 편이 되어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곁이 되어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른이다. 문동은과 주여정 모두 피해자이며, 서로의 곁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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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청년학교의 장소 이름이 “공간...곁으로”이다. 헬라어로 ‘파라클레시스’라는 위로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 속에는 "곁“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위로를 하고 위로를 받는 사람들은 서로가 누군가의 곁이 있다. 위로라는 단어는 서로에게 침투되어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생성과 회복의 감정을 경험하게 하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게 한다. 길 위에 청년학교는 곁이 필요한 사람들 곁(장소)으로 다가가는 사람들이다. 누군가의 곁에서 위로의 삶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곁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 곁은 특별한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지금 우리의 삶은 곁이 있는 장소를 요구한다. 감각하지 못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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