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언론&미디어 전문가이자 100분 토론 진행자인 정준희 교수님을 만나 뵙고 왔습니다.
새날 청국장 출연자인 권보람, 정재우님과 함께 <포스트 트루스>라는 책을 읽고 토론 후 생겨난 고민들을 직접 여쭤보는 자리였습니다.
포스트 트루스라는 책을 아직 안 읽어보신 분들을 위해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정보는 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증거보다 감정에 의해 선택되는지, 오늘날 탈진실 현상 '탈진실의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담겨있는 책입니다. 참고로 정준희 교수님이 이 책의 해제를 직접 맡으셨습니다.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책 내용 일부만 공유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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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결과를 비판하는 비전문가들은 대부분 겉으로는 '개방성'과 '공정성'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만의 이념적인 잣대를 객관적인 탐구 과정에 들이민다. 일단 대중에게 의심을 퍼뜨리고 나면 사람들이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그리 많은 노력이 들어가지 않는다. 좀 더 지능적인 사람들은 "저명한 과학자들조차 높은 과학적 표준에 고착하지는 않는다"고 비판한다. - 37p
과학부인주의는 경제적인 이유나 이념적인 이유 때문에 발생한다. 일반적으로는 가진 것을 잃기 싫어하는 자들이 처음 의혹을 던지면 역정보(고의적으로 유포된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데 혈안이 된 정치꾼들이 바통을 이어받는 식이다. (...) 기업의 로비 활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쳐왔는지 설명한다. - 40p
1969년에 한 담배 회사 중역이 남긴 악명 높은 내부 문건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의혹을 팝니다. 대중의 정신에 박혀 있는 '사실의 실체'에 맞서려면 의혹만 한 게 없기 때문이지요."
비법은 분명했다. 자신만의 전문가를 구해 연구를 지원하자, 언론에 양쪽 입장을 다 들어봐야 한다는 인상을 남기자, 홍보 및 로비 활동을 통해 자기 입장을 밀어붙이자, 그로 인해 야기되는 혼란을 활용해 문제 삼고 싶은 연구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자. - 44p
우리가 기계적 중립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진실이 이념과 이념 사이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과 거짓의 중간 지점도 결국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어떠한 정치적 이념도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진보주의자가 보수주의자에 비해 '인지적 욕구'가 강할지도 모른다. (...) 우리 모두는 인지 편향을 타고나기 때문에 눈앞에 놓인 증거를 외면한 채 주위 사람들의 믿음을 여과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집단 소속감을 가치 있게 여기며 때로는 현실 자체보다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 우리가 어떤 사실을 믿고 싶다는 의지를 이미 가지고 있다면, 게다가 우리 주위 사람들마저 그 사실을 믿고 있다면, 아주 사소한 자극만으로도 우리는 그 사실을 믿게 될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밀어붙이기 위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출처를 모두 불신하게 만든 뒤 사람들의 인지 편향을 자극해 그들을 손쉽게 조종하고 이용하려고 한다. (...) 우리 모두는 결국 정보를 얻기 위해 출처에 의존한다. 그런데 만일 해당 출처에서 정확히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나온다면 우리는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 88p
언론이 객관성에 집착한 결과, 사실 문제를 전달할 때조차 모든 입장에 '균등한 시간'을 배정하고 양쪽 이야기 모두를 공평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만약 찬반 의견이 갈리는 주제였다면 이러한 태도가 합리적이라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문제를 전달하는 보도에서는 재앙과도 같았다. 언론은 실제로는 믿을 만한 양쪽 입장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주제를 다룰 때도 '동일 시간 배분'의 원칙을 따르느라 양쪽 입장 사이에서 '기계적 중립성'을 지키게 되었다.
과학부인주의자들이 객관성에 대한 언론의 집착을 어떤 식으로 이용했는지는 이미 제2장에서 살펴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더 이상 전면광고를 실을 필요가 없었다. 어떤 과학적인 주제에 대해 '다른 연구'가 존재하는데도 언론이 해당 연구를 다루지 않으면 그것은 그 언론이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겁박을 주기만 하면 되었다. 미끼를 물어버린 언론은 기후변화나 백신과 같은 과학적인 문제조차 '논란이 많은 이슈'라고 착각하면서 양쪽 입장을 모두 보도하기 시작했다. - 110p
'기계적 중립성은 속이려는 자들이 원하는 바'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혹시 우리가 양비론에 빠진다면 세상에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를 바라는 자들의 손에 놀아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원칙을 명심한 채로 다음에 나오는 구체적인 단계들을 따라가보자. - 1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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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하게만 보더라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과 많은 비교를 해볼 수 있는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 기계적 중립을 고수하거나 팩트체크라는 명분을 앞세우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편향성을 띠고 있는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 무엇이든 정쟁화 시킨다거나 뭐든지 양비론을 만들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 5.18 북한군 개입설처럼 훗날 세월호 사건이나 K-방역 등에 대해서도 왜곡/날조 등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 부당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 어떻게 효율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지
- 학부모와 학생들 사이에 생겨나는 다양한 문제들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바라보고 해결할 수 있을지
책을 읽은 후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며 이러한 고민들이 생겨났고 이에 대해 교수님의 소중한 조언을 들었습니다. 해당 내용들은 잘 정리한 후 허락하에 차차 공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준희 교수님 덕분에 청년들과 함께 미디어 리터러시 강의도 잘 다녀왔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언론이 중요하듯 각종 미디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한다고 혹은 성과를 낼지라도 세상이 알아주는 시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사실 관계를 숨기고 비틀어버릴 수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청년&청소년들이 주로 어디서 여론 형성을 하는지, 어떻게 정보를 취합하는 중인지, 그 과정에 스며든 허위조작 정보들은 어떻게 최대한 걷어낼 수 있는지 등에 대하여 많은 사회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부할 게 참 많지만 새로운 지식을 얻을 때마다 그 자체가 참 즐거운듯합니다.
유익하고 좋은 소식들 앞으로도 계속 전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