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공정은 틀려먹었다.
청년들에게 시험은 공정의 기준이다. 인국공 사태 때도 청년들은 시험을 치르지 않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에 거세게 반발했다. 시험이 공정의 기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하는 정치에도 시험이 도입되고 있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도입한 PPAT(공직후보자기초자격평가)나 대변인 토론배틀이 대표적이다. 이 대표는 1942년생부터 2003년생까지 누구나 국민의힘 토론배틀에 참여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당 대변인이 될 수 있는 점을 들어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구절을 인용했다. 청년들 사이에서 토론배틀 반응은 뜨거웠다. 564명의 참가자가 지원한 가운데 2030 비율은 73.2%로 청년 지원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토론배틀 16강은 2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흥행을 거뒀고 남성 청년 2명이 대변인으로 뽑혔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고, 모두가 지켜봤으며, 오직 개인의 실력만으로 겨룬 이 토론회는 과연 공정했다고 할 수 있을까? 토론회는 고등학생부터 변호사 아나운서까지 나이와 직업군이 다양했다. 실제로 고등학생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면 국민의힘이 그를 대변인으로 채용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여건상 고등학생이 될 가능성이 희박했다. 당장 학교부터 졸업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 대변인은 무릇 말을 잘해야 하는 직업이다. 따라서 고등학생과 변호사 또는 아나운서가 같이 경쟁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공정한 경쟁이 아니었을까. 성인 국가대표를 뽑는 자리에 프로선수와 유스선수를 경쟁시키는 게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논쟁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프로선수와 유스선수가 경쟁해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것이 공정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논란의 여지를 잠시 내려놓은 채 다시 토론회로 돌아가 보자. 연령과 직업군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경쟁한 이 토론배틀에 청년들은 왜 열광했을까? 이 토론에도 시험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시험처럼 문제를 푸는 것은 아니었지만 토론을 지켜본 사람들은 누가 토론을 잘했고, 못했는지 파악할 수 있었고 심사위원의 평가도 대중과 다르지 않았다. 토론, 관중, 심사위원은 각각 시험, 평가, 채점자가 되어 공정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유독 청년세대가 시험을 공정의 기준으로 두는 것은 청년들의 삶에 늘 시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르면 유치원 때부터 대학 졸업까지 청년들은 늘 시험과 함께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공공연하게 시험의 결과로 학생들을 차별했고, 집안 분위기는 성적표에 좌우됐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지만 사실상 학생들에게 행복은 성적순이었다.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이해 복지부가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 5명 중 1명은 ‘행복하지 않다.’라고 응답했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로는 ‘학업·성적 부담 때문’이라는 응답이 33.9%로 가장 많았다.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으며, 2021년 12월에 발표된 국내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는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였다. 그 원인으로 늘 꼽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학업 스트레스다. 한국 청소년들에게 학업은 목숨까지도 위협하는 존재인 만큼 누군가 부모 찬스로 시험을 통과했다거나, 시험을 안 보고도 혜택을 누렸다는 것이 밝혀지면 이를 용납할 수 없게 된다. 해외 유명 사립 대학의 경우 기부금 입학 제도가 간혹 존재한다. 부모가 대학에 기부금을 많이 내면 자녀를 받아주는 건데 해외에서는 이 같은 제도가 논란이 되지 않는다. 비교적 대학 진학이 어렵지 않고, 대학 간판에 따라 남은 인생이 좌우되는 우리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다. 시장 원리로 바라본다면 기부금 입학제도는 합리적인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제도는 우리나라에서 절대 도입될 수 없을 것이다. 학생에게 시험은 목숨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급속도록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자리는 줄고 대학 진학률은 높아지면서 학벌이 중요한 사회가 됐다. SKY를 졸업해도, 대학원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고스펙 실업자가 늘면서 시험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그나마 사람을 평가하는 공정한 제도가 시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잔인한 제도다. 내가 합격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있다. 공정한 제도로 일컫는 시험 뒤엔 잔인함이 도사리고 있다. 한국 청년들은 이 잔인함을 청소년 시기에 깨닫는다. 내가 친구보다 더 잘나기 위해서는 시험에서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걸 중학생이면 깨닫게 된다. 특목고와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해, 한국 학생들은 학년이 거듭될수록 시험에 더 목을 맨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내가 죽지 않기 위해 옆 친구를 죽이는 게 지금의 한국 교육제도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학교에서 전교 1등 학생의 노트가 표적이 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지금도 잊히지 않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한 번은 중학교 체육 수행평가 시간에 소프트볼 경기를 한 적이 있다. 2루에 서 있던 내가 홈에 들어오면 우리 팀이 이기는 상황이었는데 3루 베이스를 돌던 나는 원심력을 이기지 못해 넘어졌고, 아웃되며 경기가 종료됐다. 결과는 우리 팀의 패배였다. 넘어진 내게 제일 먼저 달려온 친구는 대뜸 “체육 수행평가 점수로 외고 떨어지면 책임질 거냐”라고 버럭 소리 질렀다. 나로 인한 패배가 본인에게 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협동을 배워야 하는 체육 시간에서조차 시험은 남을 밟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배우 허준호 씨는 영화 초반 인자한 성품을 지닌 사장님 역할로 나온다. IMF를 겪고 있는 와중에도 거래처 사람과 직원을 먼저 생각하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IMF를 겪고 난 뒤 허준호 씨는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 그는 회사 면접을 보러 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잘해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믿지 마, 그냥 너만 믿어 너만. 너 자신만 믿으라고!”
우리 사회에서 공정함의 기준이 시험이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치르는 시험은 협업이 무엇인지 모른 채, 나 자신만 살면 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최저임금으로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비정규직에게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반대하는 청년과 사회가 탄생했다. 자동차 공장에서 왼쪽 바퀴를 다는 사람은 정규직이고, 오른쪽 비정규직이라고 한다. 똑같은 업무를 10년씩 해도 두 사람의 위치는 하늘과 땅 차이다. 한쪽은 안정적으로 일하면서 고연봉을 받고, 다른 한쪽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한참 낮은 연봉을 받는다. 업무는 똑같은데도 단지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사회일까? 공정함의 기준에서 시험을 뺄 순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