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땅의 프리랜서 (4) 프리랜서의 자격
혹시 000님 이신가요?
메일로 보내주신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통화 괜찮으실까요?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정말 짜릿하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사람이 왜 사회적 동물인지 단번에 이해가 됐다.
괜찮으시다면, 만나 뵙고 얘길 나누고 싶은데요. 혹시 00일에 11시쯤, 저희 사무실로 방문 가능하실까요?
네, 가능합니다. 그럼 그날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너무나 가슴이 뛰어서 하던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혼자 비실비실 웃었다. 거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데, 왜 이렇게 햇살이 아름다운지... 이건 뭐, 사랑에 빠진 10대 저리 가라였다.
사실, 나는 일적으로 만나는 미팅을 참 좋아한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보단 호기심이 앞서는 것이 첫 번째 이유요, 말주변이 좋거나 위트가 넘치는 건 아니지만 얼굴을 직접 마주할 때 내가 원하는 바를 더 전달하기 쉬운 게 두 번째 이유다. 친구들끼리 수다 떠는 모임이나 심지어 연애할 때 남자 친구를 자주 만나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일하면서 미팅이 잡히면 긴장보다 설렘이 먼저였던 것 같다.
이번에도 난 자신 있었다. 나에게 연락이 와서 미팅까지만 갈 수 있다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 기회가 왔고, 나는 이제 그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들러 갈 수 있게 되었다.
미팅 당일, 오랜만에 분주하게 차려입고 혹시나 길 헤매다 늦을까 일찍 출발해서 30분 전에 도착했다. 지하주차장에 앉아 아이패드에 저장한 포트폴리오 영상들을 점검하며 혹시나 빠진 게 있을지 확인 후, 10분 전 미팅 장소로 발걸음을 떼었다.
미팅은... 나의 예상대로, 정말 감사하게도 사장님은 내 경력과 작업들을 의미 있게 봐주셨다. 교육영상에서 많이 쓰이는 획일화된 색감과 폰트를 벗어나 좀 더 퀄리티를 높이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하셨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악수를 나누고 추후에 실장님께서 따로 파일을 정리해서 주시겠다는 말에 감사하다는 인사로 답하며 미팅은 끝났다.
와.. 진짜 됐다. 정말로 됐어.
갑자기 긴장이 확 풀리며 피곤함이 한 번에 몰려왔다. 당장 운전을 시작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릴랙스 되어 운전석에 앉아 의자를 뒤로 넘기고 30분을 눈감고 있었다. 하아... 됐다.... 수고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바로 연락이 올까 싶어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며 며칠을 보냈지만, 한 동안 소식이 없었다. '내가 착각한 건가? 분명히 긍정적인 신호가 있었는데? 이상하네...'라고 생각하며 포기할 때쯤, 실장님께 연락이 왔다. 내가 작업해줬으면 하는 영상이 하나 있는데 가능하냐는 질문에 '당연하죠!'라고 외치며 파일을 받아서 확인 후 연락하기로 했다.
이때부터는 사실, 겸손하고 냉정함이 필요한 타이밍이었다. 정확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늠해보고 책임질 수 있는 범위까지만 맡아야 했었다.
하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는 말이 딱 나였다. 무식해서 용감했고 의욕만 앞선 아마추어였다.
음.. 영상 원본이 꽤 크구먼. 4K로 찍었구나.
에프터이펙트? 이건 뭐, 쌤한테 부탁하면 가능할 거고.
원본 때깔이 영~ 엉망이구만. 보정 좀 해야겠네.
내용은.. 대학 강의는 역시 재미없군. 편집할 때 이해만 되면 되지 뭐.
고백하자면, 예전에 같이 작업했던 디자이너분이 있는데 나는 그 분과 함께 영상을 배워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내용적인 컷편집과 스토리보드를 기획하면, 그분은 기획 이상으로 영상을 구현해주셨다. 둘 다 출판을 메인으로 활동했었기 때문에 영상 편집 기술 쪽으로는 두 사람 다 초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나보다 편집을 잘하셨고 모르는 건 금방금방 찾아서 해결하는 능력이 대단한 분이셨다.
나는 그분이 나의 비빌 언덕이자, 언제나 함께 일할 수 있는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를 거침없이 영상 편집 프리랜서라고 소개하며 일거리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도, 내가 조금 부족해도 그 분과 함께 작업한다면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그 작업이 내 능력 밖의 일거리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게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그땐 몰랐다.
연고도 없는 업체와 딱 한 번의 미팅만으로 일거리를 만들어냈다는 지나친 자부심이 순간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고, 내 능력 밖의 일을 남에게 기대서 해결하려고 했던 무책임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나는 감히 상상도 못 한 채 의욕만 앞섰다.
그렇게 무식하게 용감하기만 한 나는, 나의 파트너에게 작업 여부도 확인해보지 않은 채(무조건 함께 해주실 거라고 믿었나 보다. 다시 생각해도 무슨 깡이었는지 모르겠다;;), 요청받은 마감일에 맞춰 작업을 완료하겠다고 실장님께 피드백을 보냈다.
내 속에 싹 튼 자만심이 던진 미끼를
나는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