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2000) 안전 관리

241022 관람

by 이지와



‘본 영화에 출연한 강아지들은 담당 관리자와 전문 의료인의 입회하에 안전 관리 되었습니다.’ 오프닝 시퀀스에 변명처럼 나오는 알림 문구를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영화를 찍을 때면 응당 준수해야 하는 윤리란 게 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촬영 당시는 2000년이며 해당 작품이 CG는커녕 정교한 동물 모형조차 만들 여건이 안 되었던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작중 등장하는 수 차례의 동물 학대 장면을 어련히 요령껏 촬영했겠거니 하며 터부시하지 못하게 된다.


이름까지 크레딧에 올린 누군가의 반려견들이 높은 곳에서 떨어질락 말락 두 다리에 뻣뻣하게 힘을 준 채 인간의 양손에 붙들려 있다가 밧줄에 목을 매달려 낑낑대고 입 밖으로 혀를 내놓고 죽어 식칼에 썰리거나 흙에 파묻히고 경비원과 노숙자는 그 사체를 고아서 보신탕을 해 먹으려고 달려들고 백화점에서 가구 들이듯 사십만 원을 치르고 푸들 한 마리를 데려오기까지, 현재의 감수성으로 용납할 수 없는 장면들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철저히 플롯과 구조만 두고 판단했다면 보통 이상은 먹고 들어갈 영화였겠지만, 이토록 사실적인 울음소리와 경직된 몸체로 종합하건대 애초에 안전 관리를 하긴 했을는지 의문이다.


물론 나도 장날마다 백구 한 마리를 노나 먹던 옛 시절의 문화적 맥락을 이해한다. 영화 『플란다스의 개』는 실재하던 우리 현실에 비하면 고작 새발의 피일 것이다. 개 식용 금지법이 제정되기 훨씬 전, 농경사회 때부터 쌀농사 문화권이었던 아시아에서 강아지가 인간에게 해 줄 수 있는 역할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인간의 귀중한 동력이라 함은 우마를 일컬었기에 개고기는 부족한 영양 균형을 맞추는 데 도움이 되었단 사실을 무시해선 안 된다. 가뜩이나 급박하게 산업화 된 대한민국 사회에서 비인간 동물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인식은 미비했고, 결국 이 영화는 방식이 좋든 싫든 한국 사회의 민낯을 보여 주는 셈이다.


그렇지만 앞뒤 가닥을 전부 고려하고도 내가 혹평을 남겨야만 하는 까닭은 모두가 괘념치 않아 했던 시대라고 하여 2024년을 살고 있는 나까지 반시계 방향으로 역행할 수야 없기 때문이다. 향후 이십 년간 쓰일 감독의 사상이 녹아든 미장센 따위 내 안중에 없으며, 예술 작품의 시대성과 재현의 윤리 이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대답하겠다. 예술 바닥에서 규격으로 삼을 최고 개념은 없단다. 지당하다. 과연 존재하려야 할 수가 없다.


무질서를 인정한 이다음 수순으로, 창작자에는 어쩔 수 없이 단 하나의 의무가 남겨진다. 창작자는 대중 앞에 최선의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서 예술 및 도덕 부문 논의의 장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런즉 영화 『플란다스의 개』와 그 폭력성을 부릅뜨고 시청한 두 시간 남짓은 최악이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