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넷(2025)

Hamnet

by 이지와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일평생 가장 사랑한 여인 한 명이 있으되 그녀의 이름은 앤 해서웨이라고 했다. 셰익스피어는 아내에게 다음 생에 태어나서도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짙은 초록이 두터이 쌓여 있는 숲속. 붉음으로써 대비되는 여자가 있다. 낡아 보이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검은 머리의 여자가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되부르는 휘파람 소리 한 번, 이윽고 그곳에는 잎사귀 사이를 고고하게 가른 매 한 마리가 아녜스의 장갑 위로 안착한다. 그때 아녜스의 소리에 반응한 것은 맹금류뿐 아니다. 작게 창이 나 있는 건물 안에서 아이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던 남자의 눈에 녹綠과 홍紅이 아른거린다. 유달리 푸른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이 교사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여자를 찾아간다.


남자는 숲속 마을 장갑쟁이의 아들로, 가업을 잇기는커녕 여러 곳을 전전하다 막 고향으로 돌아온 참일진대, 한눈에 끌리는 여자에게 다가가 사랑을 고백하듯 자신의 이름을 알렸음에도 그녀의 대답을 듣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키스한다면 알려 줄 수도 있겠지요. 처음 만난 사이에 진도가 빠른 게 아닌가 싶어도 윌리엄은 여자의 입술에 자기 것을 포갠다. 그 순간 숨 한 줌을 토하듯 여자가 대답하길. 아녜스.


아녜스와 윌리엄은 걷잡을 수 없이 사랑에 빠진다. 마녀의 딸과도 같다며 뒷말을 듣는 아녜스와 아버지에게 쓸모없는 문제아 취급을 받는 윌리엄은 단지 서로를 사랑한다는 이유를 추진력으로 삼곤 약혼, 육체적 관계, 결혼해서 살림을 합치기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함께하는 사랑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의 결속력을 점점 키우며, 아녜스의 배가 두 번이나 불러오도록 한다. 첫 아이는 윌리엄이 잠들어 있을 때 홀연히 일어나 숲속에까지 비틀대며 걸어간 아녜스가 탄생시키니 건강한 장녀 수재나가 된다.


두 번째 임신 때는 상황이 사뭇 달라진다. 윌리엄은 낮이면 장갑 제작을 배우다가도 아버지의 폭언에 지쳐 그 역시 폭력적인 맞대응을 저지르고, 밤이면 책상에 늘어놓은 양초 불빛에 의존하여 종이에 글을 끄적이다가 격정적으로 흐느낀다. 아녜스는 그녀의 남편이 이곳에 갇혀 있을 만한 인재가 아니란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보았다. 글과 연극, 창작을 향한 그의 열정을 모르는 척할 수 없던 탓에 윌리엄을 영국의 수도인 런던으로 보내야 했다. 물리적 거리가 벌어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래도 아녜스는 윌리엄을 굳게 믿는다.


폭우가 내려 강물이 범람한 날, 산통을 느낀 아녜스가 남편이 없는 집에서 하녀와 시어머니의 손에 붙들려 숲행行을 가로막힌다. 아녜스는 짐승처럼 아우성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녜스는 본인의 아기를 숲속에서 낳길 바랐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광기에 가까운 흥분을 겨우 가라앉히며 포효한 끝에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지만, 뱃속 장기들이 다시 한번 뒤틀리는 감각에 휩싸이면서 그녀는 일순 죽음을 예감한다. 아무리 미래의 이미지를 볼 수 있는 그녀일지언정 죽음에 이르는 대신 (“내가 죽을 때 임종을 지켜 주는 두 사람이 당신들이었군요”) 두 번째로 쌍둥이 여자아이를 낳는다. 어쩐지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감사하게도 비극의 시점은 아직 당도하지 않아 죽은 줄 알았던 여자아이가 기적적으로 자그마한 음성을 흘리기 시작하니 이 집안의 둘째는 햄넷 그리고 주디스가 되겠다.



햄넷. 따라서 Hamnet. 우리가 보기에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인명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뛰어난 후기 희곡 중 가히 최고작에 이름을 올리는 『햄릿』의 오기일는지.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은 덴마크의 전설에 나오는 왕자 Amleth의 마지막 알파벳 T를 맨 앞으로 당겨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르게 해석될 공간이 존재한단 뜻이다. 영화 《햄넷》의 원작 소설은 햄릿과 햄넷은 같은 이름이고 셰익스피어는 둘을 혼용하였다는 셰익스피어 전문 학자 한 명의 주장 또는 연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출발하였다.


상상력을 가미한 줄거리인즉슨 셰익스피어가 안타까운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아들 햄넷의 이름을 그대로 예술 활동에 가져다 썼다는 이야기인데, 아녜스라는 캐릭터가 그걸 처음부터 수용했을 리 없다. 아녜스는 세 아이를 전부 살릴 수 있다면 심장까지 꺼내놓을 수 있다고 단언할 만큼 강력한 모성애의 소유자이다. 갖가지 약초의 생김새와 효능을 구분할 줄 알며, 평범한 자들에게는 비가시적인 것들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눈을 지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 또한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엄지와 검지 사이 누르면 오목하게 들어가는 손등 부근을 문지를 때 그 손의 주인이 누구건 아녜스의 눈꺼풀 안에는 미래가 드리운다지만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런던으로 보내면서 가족 앞에 닥칠 비극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했다. 매번 입버릇처럼 두 아이가 자신의 임종을 지키리라고 힘주어 말하다 두 번째 출산에서 쌍둥이를 낳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고통이 극심한 나머지 잘못된 죽음을 직시하기도 한다. 뽀얗게 볼살이 오른 아들의 손등을 만지작거리며 예지하길, 너는 장차 강인한 남성으로 자라 아버지와 함께 극단에서 일하리라. 칼을 휘두르는 배우가 되고 싶다던 햄넷은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주디스 대신 죽음의 손아귀로 용감하게 뛰어들고 말았다.


우리가 금세 닥쳐올 비극을 예감할 수 있는 두 눈을 지녔다면 어떨까. 시간이라는 개념은 오롯이 인간들에 의해 발명된 것이며 사실 우리 우주의 흐름이 뒤에서 앞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만 흐르는 일직선 방향이 아님을 깨닫는다면 아녜스처럼 특별한 감각을 인식할 수 있는 자들의 등장이란 놀랍지 않다. 주인공의 남다른 특질은 하나의 본보기로만 표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로미오와 줄리엣 또는 맥베스, 햄릿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결함과 더불어 미덕을 양면의 거울처럼 가지고 있다. 그네들은 이룰 수 없는 것을 갈망한 끝에 파멸해 가는 세계를 두 눈 부릅뜨고 바라만 봐야 할 수도 있으며, 오해에서 말미암은 선택을 저지르고 나서 위험을 타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함에도 무력감을 느낄 수도 있다.


남동생인 바솔로뮤의 손에 이끌려 윌리엄이 단장으로 활동하는 글로브극장에 들어선 아녜스의 모습이 마치 돌부리에 깎여나간 듯 건조하고도 비통해 보인다. 그녀의 귀에 은유와 직설로 이리저리 들어찬 배우들의 대사가 곱게 들릴 리 없었다. 이 바보 같은 연극을 단 일 초라도 더 관람하기 싫다며 만류하는 바솔로뮤를 뿌리치려고 했던 아녜스의 시야에 윌리엄이 들어온다. 아녜스는 홀린 듯 군중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제일 앞 열에서 무대 바로 위를 올려다본다. 극중 죽은 선왕의 유령 역을 맡은 윌리엄은 온몸에 회반죽을 치덕치덕 바른 채 햄릿 역을 맡은 젊은 배우의 말간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직 건강하던 세 명의 아이들이 지푸라기로 엮은 모자를 뒤집어쓰고 추한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은 추하다며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이 바로 어제와도 같다. 시간은 뒤섞여 아녜스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을 적 저곳은 동쪽, 그리고 줄리엣은 태양이다―는 대사를 적었을 청년 시절이 어제와도 같다. 햄넷의 일부분을 이어받은 햄릿 왕자가 평행사변 형태의 무대 위에서 칼을 휘두르니 언뜻 아녜스의 일전 예언이 생경하다. 부부가 사랑하던 아들 햄넷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부재하다고 여길 수도 없었다. 영화 《햄넷》에서의 윌리엄이라는 인물은 차라리 당신을 죽은 아들의 자리에 스스로 세우길 자처해야만 비로소 비극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객석의 아녜스를 마주하는 윌의 눈동자에서 완전한 기쁨이나 완전한 슬픔에 속하지 않는 눈물이 흐르자, 두 사람은 비극에서 밀려나지 않게 된다. 비극은 자연스럽게 소멸하거나 그 무게가 덜해지지 않았다. 그 존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네 삶은 죽음과 동침하니 이를 바로 삶이라 부르겠다.


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비극을 구체적으로 감지할 수 없는 한낱 인간인 것이 마음에 든다. 아녜스, 앤의 오기가 아닌 다른 표기일 뿐인 그저 Agnes. 윌리엄이 일평생 사랑한 그녀 역시도 그랬음이 틀림없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봤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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