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만두는 게 정말 답일까?
추석 연휴가 성큼, 며칠 전으로 다가왔다. 연휴를 준비하며 들고 나는 사람들로 수영장은 어수선하면서도 평소와 달리 조용하다.
"돈 가져왔니? 만 원만 주면 되는데."
"네?"
있는 사람도 없어, 다른 날보다 더 싸늘한 탈의실에서 앞뒤 없이 훅 들어온 떡값 요구는 실로 당황스러웠다.
"이거 그저께 얘기했는데? 많이 봐준 거야."
여과 없이 드러나버린 황당하단 듯한 반응에 도리어 새삼스럽다는 리액션이다.
'그저께'라고 하면, 아마도 강습이 끝난 후 자리를 떠나는 초급반을 향해 별안간 "곧 연휴니까 만 원씩 가져와?"라는 외침이 들렸던, 잠깐의 순간을 말하는 걸 테다.
"아, 아뇨."
"뭐가? 아니라는 거?"
"저희 레인은 어차피 돈 안 걷을 거라서요."
"뭐라고?"
"하고 싶은 사람들만 각자 알아서 하기로 했어요."
상대는 아주 의뭉스럽다는 표정이다.
"아무도 안 낸다는 얘기니?"
"방금 말씀드렸지만... 내고 싶은 사람은 내겠죠? 일단 저희는 돈은 안 걷어요."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의미 전달은 다 했다 싶어, 그대로 사물함 문을 닫고 샤워실로 가려고 했다.
"얘, 너 강사님한테 강습 안 받니?"
이토록 날카로운 반응은 사실 예상하지 못했다.
"받죠. 강습비 냈잖아요."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이러나, 그동안 한 번도 안 냈었어?"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나? 아무튼 앞으로도 낼 생각 없어요."
딱 잘라 떡값 낼 생각 없다고 대답했다. 나름의 분명한 의사를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있던 초급반은 전체 레인에서도 연령대가 가장 어렸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도 있었고, 잠시 휴학 중인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 직장인 등... 다양하게 젊은 구성이었다. 그래서 '떡값'이란 문화가 더 낯설었던 것 같다.
개강을 기다리며 수영을 다니기 시작한 친구들은 '떡값'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다.
"근데 떡값이 뭐예요?"
물어보는데, 이걸 어떻게 정의해서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삥' 뜯는 거라고 해야 하나?
처음 수영을 시작한 건, 작년부터였다.
수영장 텃세나 떡값 요구가 심하다고 풍문으로는 많이 들었지만, 정말 '설마'했다.
"이 시간에 초급반 없는데, 시간 옮기지 그래?"
이름도, 당연히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 옷 갈아입다가 들은 인삿말 대신이었다. 그 순간엔 말의 저의도, 의미도 이해가 도통 안 돼서 물음표만 띄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급반 소속 강사가 새로 온 수강생(나)에게 기본 호흡법, 자세 하나 잠깐 알려주고 간 게 이 모든 사달의 화근이었다고 한다.
"데스크에서 배정해 준 초급반 시간으로 들어온 건데요."
"데스크는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이 시간에 초급반이 있어?"
데스크 탓하는 척, 나보고 들으라고 눈치를 주기 시작한다.
"아니, 나는 이 시간에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가만 보니 수영 아예 처음인 거 같던데, 본인 수준 맞는 시간대로 다시 잡아서 가라는 거지."
"이 시간이 맞아서 들어온 건데요, 저도. 일정이라는 게 있어서요."
당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린애한테 왜들 그래! 초급반이 없기는... 초급반 오늘 바빠서 고급반 강사님이 여유가 있으니까는 호흡법 그 기초 하나 가르쳐준 거를 갖다가 아주 잡아먹네, 잡아먹어. 왜들 그래, 창피하게 좀 그러지들 말어!"
그때 한 아주머니가 나를 두둔하며 나섰다. 그리고 그녀는 곧, 나의 첫 번째 수영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텃세 사건 이후로, 나는 아주 미묘한 아집들을 경험해야만 했는데 가령 수영이 끝나고 샤워를 할 때였다.
이미 자리를 잡고 샤워를 하고 있는 도중, 나를 밀어내며 자리를 차지하는 황당한 경우가 여럿 발생했다.
"저 지금 여기 샤워하고 있는데."
"못 봤네? 근데 곧 끝나가는 거 같은데 같이 좀 써요."
그런 식으로 밀려나 샤워를 마친 적이 몇 차례에 이른다.
이는 조금 애매한 경우지만, 지나가면 지나가는 대로 쑥덕거리는 일도 허다했고, 묘하게 불쾌한 시선이 느껴져 쳐다보는 곳엔 늘 삼삼오오 모여 귓속말을 주고받는 어느 무리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이곳 수영장보다 훨씬 더 넓고 그들은 어느 동네 주민들일 뿐, 그 어떤 존재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크게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게다가 나는 이미 속한 초급반에 수영 친구들도 생겨, 꽤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친해진 사람들과 함께 다니면서 수영 끝난 후엔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만나 놀다 보니 사사롭게 이어지던 텃세도 어느 순간 종적을 감췄다.
하지만 못된 것들은 어떻게든 또다시 제 모습을 과시하기 마련이다.
"곧 스승의 날인 거 알지? 이번 주까지 다들 만 원씩 내."
그놈의 떡값 시즌이 또 돌아온 것이다.
"이게 떡값 그거죠?"
"완전 신기하다"
"저 인터넷에서 떡값 썰 봤는데, 아직도 이런 데가 있네요?"
대부분 반응은 이러했다. 충격보다도, 신기함 그 자체. 관심도 딱 그 정도 수준에서 멈췄다.
그런데 며칠 후, 한 친구가 모르는 사이 고급반에 불려갔다. 초급반에서 도무지 떡값이 안 나올 듯하니, 타겟을 골라 총대를 쥐게 만든 것이다.
"우리 다 돈 안 낼 거 같다고, 나보고 대표로 걷어 오라는데. 아니, 운동하러 와서 진짜 왜 이렇게까지 해야 돼?"
제법 골치 아픈 듯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건만, 그들은 상상 이상으로 집요하고 치졸했다.
"내고 싶은 사람만 내, 그냥."
"이거 그냥 삥 뜯는 거 아니에요?"
"돈 만 원도 없으면서 무슨 선물을 한다고.. 어이 없네."
기꺼이 내고 싶어서 내겠다는 사람들에게는 굳이 뭐라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강제로 돈을 수금하겠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조용히 참아왔던 불만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설, 추석, 스승의 날, 생일... 그간 돈을 걷어가는 명분은 다양했고, 그 사이 몇몇은 좋은 마음으로 운동하러 와서 이런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며, 얼마 못가 수영을 관두기도 했다.
결국, 먹고 떨어지란 의미로 만 원 한 장 던지고 총대는 수영을 관뒀다.
그리고 또 다시, 돌아온 다음 해 추석 기념 수금의 총대는 다름 아닌 내가 되었다.
"총대 매고 초급반 돈 걷어 와."
이쯤되니, 다들 제정신은 아니구나 싶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나는 꿋꿋하게 돈 한 푼 내지 않았음에도, 이젠 그런 나를 지목해 돈을 걷어오라는 억지를 부린다.
"전달만 할..."
"전달 말고, 걷어오라고."
"전달만 하겠습니다."
"전부 다 걷어서 나한테 가져오면 된다?"
"그건 선택사항이고요, 저는 전달만 할 거예요."
내 말이 괘씸하다고 느낀 걸까. 그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돌려 탈의실을 나갔다.
만 원이면 내가 마실 수 있는 커피가 무려 두 잔이다. 강습비는 이미 착실히 때마다 결제하고 있는데, 그놈의 망할 떡값은 왜 자꾸 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추석이라고 떡값 내라고 하는데, 저보고 걷어오라고 하시네요. 근데 저는 돈 걷고 싶지도 않고, 걷을 생각도 없어서요. 하고 싶은 분들은 각자 알아서 하시고, 안 내고 싶은 분들은 그냥 제 말 무시하세요."
그렇게 이틀 후의 탈의실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저희는 내고 싶은 사람들만 따로 내는 걸로 얘기했어요."
"너희 레인 애들 다 같은 생각이야?"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고, 감사하게도 동의해 주셨어요."
어이 없다는 듯 그가 탈의실을 나가고, 이후로 별 일은 없었다.
그 뒤로 이사를 가게 된 나는 공교롭게 수영장을 관두게 됐지만, 앞으로도 어느 수영장을 가든 어떤 떡값에도 보탬이 되지 않을 생각인 것은 여전하다.
수영을 다니면서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스승에 대한 감사를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그 정도로 수영 강사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나는 충분한 강습비를 지불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떡값을 내야 할 그 어떤 타당한 이유 또한 찾지 못했다.
소정의 선물을 주고 싶을 정도로 강사에게 감사한 마음이 있다면, 그건 그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했을 때 더욱이 아름다울 것이다.
강제로 빼앗아 만든 돈으로 이룬 선물이, 당최 무슨 의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