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워왔지만 K-장녀.
나는 대한민국 K-장녀이다. 원해서 여자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엄마는 시모한테 구박도 받았다. 구박한 할머니도 여자, 구박당한 엄마도 여자, 구박당한 원인이 된 나도 여자다. 여자는 여자한테 왜 그러는 걸까.
아무튼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인지 나에게는 의무만 가득하고 지원은 전무했다. 첫째니까 잘해야 하고, 첫째니까 삐뚤어지면 안 되는데 여자니까 해 줄 것은 없다고 했다. 어디서 온 유전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생존본능이 강했던 나는 내가 살려면 이 집을 탈출해야 한다고 고등학교 즈음부터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본가를 벗어나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지원하겠노라 선언했다. 그랬더니 여자애한테 돈 들여서 공부시키는 거 아니라는 온갖 타박을 들었다. 엄마는 여자는 교대를 나와 선생님이 되는 것이 제일이니 교대를 가지 않을 거면 학비도 대주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늘 무조건 공부도 생각도 똑 부러지게 잘해야 한다고 교육받은 첫째였던 터라 그런 협박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애초에 순종적인 여자로 키울 작정이었다면 뭐든 대충 하라고 가르쳤어야지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은 뭐든 잘하는 누나가 되라는 말은 왜 하면서 키웠을까. 오냐오냐 사랑받은 우리 집 아들은 늘 공부도 꼴등이었지만 남자라서 괜찮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이십 대를 지내는 동안 나는 엄마에게 절대 연애도 결혼도 안된다는 잔소리를 들었다. 아직 결혼하는 거 아니고, 함부로 연애하는 거 아니라고 했다. 한 십 년 가까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고 있자니, 이유가 너무 궁금해졌다. 엄마에게 물었더니 어느 용한 점쟁이가 그 집 딸은 서른 넘어서 결혼해야 잘 살고, 그전에 결혼하면 이혼할 팔자라고 했다나. 이혼을 하면 안 되니까 결혼도 하면 안 된다니 어떤 논리는 참 쉽기도 하다.
하지만 엄마와 적당한 물리적 거리두기를 성공한 나는 엄마가 뭐라고 하던지 연애를 했고 남자를 만났고, 결혼을 할 뻔하기도 했다. 남자가 결혼을 원한다는 말을 했더니 엄마가 그 남자의 음력 생일과 태어난 시를 캐물어 다시 용한 점쟁이에게 보고했고, 이 친구는 안된다는 답을 가져와서 파투가 나긴 했지만. 꼭 그 이유 때문은 아니고 그렇게 막강한 사랑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괜찮았다. 결혼해서 엄마처럼 살아야 한다면 결혼이 싫었다. 그즈음의 나는 혼자 사는 일이 점점 너무 즐거워지고 있었다.
서른이 된 새 해. 엄마는 사귀는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그 이후로 누굴 만난다는 소식을 전하면 이런저런 원하는 사윗감 상을 너무 읊조리기도 했고, 어떤 남자에게는 엄마 아들의 취업자리를 청탁하려고도 해서 나는 온갖 정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곁에 누가 있건 없건 늘 없다고 말했다. 내가 누굴 만나건, 결혼을 하건 말건 엄마와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갔다. 결혼이 아니라 독립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잔소리는 커져갔다. 딸이 나이가 그렇게나 찼는데 시집을 못 보내면 자기 입장이 난처해진다고 했다. 아, 엄마는 또 딸의 입장은 아랑곳없이 엄마의 입장만 중요하구나. 언젠가의 날엔 전화로 대뜸 "너는 뭐가 그렇게 문제라서 시집을 못 가니?" 하고 인신공격을 퍼붓기도 했고, 언젠가의 날엔 "엄마가 제발 사정하자. 너 좀 치우고 살자."라고 나를 쓰레기 취급했다. 치우긴 어디다 치워.
마흔이 된 새 해. 자꾸 밖에 나가서 남자를 하나 주워오라고 하는 잔소리 끝에, 내가 정말 길 가다가 남자를 하나 주웠는데 데려가겠다고 했더니, 엄마가 갑자기 너무 기뻐서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고 했다. 왜 배가 부른 걸까. 본인이 사랑을 시작한 것도, 딸의 남자가 자기 남자도 아닌데.
결혼에 관한 것을 상의하려고 주운 남자와 함께 집에 갔더니 여자 집에서 무엇을 해오길 바라냐고 물었다. 여자를 보내는 쪽 집에선 늘 조심스럽다며. 남자는 몰라도 여자를 보낼 때는 신경 써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의식 같은 것들은 정말 필요 없으니 그런 것을 위해 돈을 아껴두었다면 신접살림에 보탤 수 있게 돈을 달라고 했더니, 너 줄 돈은 없대. 그러면서 왜 자꾸 시집을 가라고 했을까. 정말 엄마의 이기심이었을까.
딸에게 보태줄 돈은 없는데, 남의 눈치를 위해서 반상기를 사고 이부자리를 사고 함을 챙길 돈은 있다니 엄마의 주머니는 정말 신기하다.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이야기를 들은 짝꿍은 빵 터지면서, 정말 너 주워 온 게 맞나 보다 했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경상도식 남녀차별을 숱하게 들었기 때문일 테다. 아, 정말 주워 온 자식으로 사는 게 피곤하네. 하는 말에 짝꿍이 웃으면서 말한다.
"이제 내가 주워 왔지!"
하... 정말 여자로 줏대있게 사는 것이 힘드네. 아무도 주워가지 못하도록 힘 있게 살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