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서 차분이 기다려 주는 것이 내가 할 일.
매일 아침 늦잠을 잔다. 일찍 일어날 이유도 없거니와 알람도 울리지 않는다. 자고 싶어질 때 잠들었고, 일어나고 싶을 때 눈을 떴다.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느라 뽀시락 거리면 짝꿍도 눈을 뜬다.
우리는 원두 취향이 달라서 어차피 각각 커피를 내려야 하기 때문에 일단 내 커피를 천천히 마신 다음에, 원하는 원두로 원하는 커피를 내려서 주는 편이다.
근데 이것도 좀 귀찮으니까…
신혼 가전으로는 꼭 발뮤다 더 브루 사쟈.
나도 누가 내려주는 커피를 맛있게 먹고 싶어.
네가 귀찮은 건 나도 귀찮지.
사람 마음은 다 그렇잖아?
오늘은 태풍과의 눈치게임이다. 비가 내렸다가 말끔히 개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바람이 더 거세지기 전에 나가자. 움직여보자!
우리는 고살리 숲길로 향했다.
숙소 근처에 눈여겨보아 둔 몇 개의 산책길 중 하나다.
마침 비가 개인 시간이라서 기분 좋게 움직였다.
천천히 느긋하게 걸어봅시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것 같은 이 작은 길은 흙 위에 나뭇가지와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기분을 매만져준다.
틈틈이 독버섯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바로 곁엔 물이 흐르고 있어서 물소리도 너무 좋다.
끝까지 가지는 못하고 멋진 계곡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아이구- 도시락을 하나 싸왔어야 하는 풍경이다.
배가 꼬르륵대기 시작하는 멋진 풍경이다. 입맛을 다셔본다. 뭘 먹어도 맛있을 것 같은 이 자연의 냄새라니.
점심은 레스토랑 점심에서 먹었다. 여기도 점심에만 운영하는 곳이다.
바삭한 돈까스와 맥주 한잔을 캬! 하고 입 안으로 쏟아부었더니 아까의 피곤함이 사르륵 녹는다.
역시 여름엔 낮맥이다.
지독한 술쟁이랑 결혼한 짝꿍은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이다.
그리고 술을 많이 마시면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신경안정제를 챙겨 먹는 짝꿍의 옆에서 술을 벌컥 들이키는 파트너라니.
나도 참. 이래도 괜찮은 걸까 싶다가도
그의 옆에서 그냥 내 모습 그대로인 채로 남아주는 것이 제일이겠지 하고 나를 위안한다.
밥 먹고 돌아오는 길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치게임은 이제 슬슬 접어야 할 것 같다.
얌전히 집 안으로 들어가야지. 이제 태풍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낯선 동네, 섬에서의 태풍은 조금 무섭다.
짝꿍은 차를 덮을 천을 수소문해서 찾고 있다. (하지만 말끔히 실패) 큰일이 없을 거라고 다독여보지만, 그의 예기불안은 보통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다.
공황장애의 두려움은 나로서는 잘 이해 못 할 부분이 많다.
하지만 곁에서 차분히 기다려 주는 것, 그리고 별일이 아니라고 다독여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거세지는 비바람을 느끼면서 우리는 와인을 꺼내 들었다.
어딘가에서 구해 온 하몽을 얹어먹을 과일은 복숭아가 유일했다. (멜론 왜 안 샀냐)
은근히 단짠의 조합이 나쁘지 않다.
짝꿍에게 부탁한 살라미는 너무 두꺼워서 짭짤한 맛이 세다.
그래도 와인에는 딱이지!
주변을 한번 더 살피고, 혹시나 싶은 마음인지 응급실도 살피는 그의 옆에서
나는 속절없이 와인이나 들이킨다.
아이구- 갠찮아~~
별일 없을 거야. 잘 지나갈 거야.
슬렁슬렁 괜찮은 기분이 될 때까지 영화나 한편 보자.
나와 영화가 너를 기다려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