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Aug 01. 2019

책 선물

_엄마는 책을 읽지 않는다.


엄마와 밖에서 저녁을 먹기 전, 시간이 남아서 서점에 갔다. 시내에 있는 대형 서점이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잡지 코너를, 실용서 코너를, 문구류 코너를 돌다가 에세이를 취급하는 코너에 머물렀다.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이만큼씩이나 된단 말이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나는 매대에 누워 있는 책들의 표지를 어루만지거나, 어떤 책들은 한 손으로 넘겨보면서 생각했다. 내 옆에서 엄마는 내가 훑고 간 책들을 따라서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별 흥미가 생기지 않는지 이내 그만두었고 스마트폰을 꺼내 보는 것 같았다.

      

단지 시간을 버리기 위해 서점에 온 것이었는데, 그냥 가면 집에 가서 분명히 생각이 날 책을 만났다. 결국 그 책을 사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엄마가 옆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곧 건너편 서가에서 붙박인 듯 서 있는 엄마를 발견했다. 내가 다가가서 무엇이냐고 묻기도 전에 “이 책이 사고 싶어”라고 엄마가 말했다. 놀라웠다.

내가 아는 한 엄마는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이 ‘읽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 이 책을 ‘사고 싶다’고 말한 것 또한 무척 상징적이다. 엄마가 사고 싶어 한 책은 박준 시인의 에세이집인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었다.

      

엄마는 책을 읽지 않는다.

나는 엄마를 통해서 조덕배를 들었고, 정훈희의 <무인도>보다 김추자의 <무인도>가 멋지다는 것을 알았다. 클라크 게이블과 클로데트 콜베르가 주연한 영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에서의 재미있는 장면에 대해 엄마와 한 시간 이상을 떠들 수 있다. 그러나 엄마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우리 엄마는 음악도, 영화도, 시시껄렁한 잡학에도 관심이 많지만 왜 책을 읽지 않는지.     


어렸을 때는 적극적으로 엄마에게 독서를 권장해 보기도 했다. 엄마와 거의 모든 이야기를 능통하게 할 수 있는데 유독 책에 한해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의아했다. 또래 친구와 하면 될 일이지 굳이 엄마와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나를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파수가 맞는 또래 친구는 아주 드물었고, 찾았다고 해도 그들에게 나에 대한 배려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을 통해 바람을 이루기도 했다. 엄마의 취향과 집중력을 부단히 고려하여 그녀가 독서의 세계에 한 발을 내딛기 좋은 책이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일상의 아기자기한 글감, 섬세하고 친근한 문체는 과거에 대한 이상한 낭만과 회고 지향적인 취향을 갖고 있는 엄마가 좋아할 만했다. 호흡이 짧은 분량의 글이라는 점도 적절했다. 끝까지 읽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엄마는 만족스럽게 읽은 듯했다. ‘아사코’와 관련한 일화에 대해서는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기도 했다.


스스로 독서에 취미를 붙이려는 엄마의 모습도 몇 차례 본 적은 있다. 비교적 최근이다. 엄마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고 시도했던 내 모습이 희미해졌을 무렵이니까.

본가의 내 책장에서 그녀가 고른 책은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작은 판형과 마치 기담집 같은 표지에 끌렸을 것이다), 아사다 지로의 『장미 도둑』(엄마는 장미꽃을 좋아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하루키 단편 걸작선』(왜지? 하루키란 이름은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 봤으니까?)이었다. 이 중 한 권뿐이지만, 엄마는 『장미 도둑』을 완독했고, 그 서정적인 세계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이것이 내가 아는 엄마의 독서 이력이다.     



우연히 들어온 서점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에게 책을 선물했다. 엄마가 읽고 싶어 하는 책을 선물할 수 있어서, 그것이 또한 내가 외우는 몇 안 되는 시구의 주인이 쓴 책이라서 기뻤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듯 엄마가 사다 준 책을 읽고 자랐다. 인생 최초의 책을 기억한다. 정밀한 그림체의 의인화된 아기 동물들이 등장하는 두껍고 딱딱한 재질의 유아용 도서였다. 책 속에서 동물들이 바나나나 딸기잼을 들고 있었는데, 그 부분을 문지르고 코를 가져다 대면 정말 달콤한 바나나와 딸기잼 냄새가 났다. 내가 두 돌 때쯤 되었을 때, ‘점촌’이라는 소읍으로 이사를 갔는데, 서울내기였던 엄마가 동향 사람인 외판원에게 산 책이라고 한다.      


계몽사의 『디즈니 그림 전집』도 내가 좋아한 책이다. 전 60권 중 「추위를 싫어한 파블로」를 가장 좋아했다. 추위를 싫어한 펭귄 ‘파블로’가 자신이 원하던 따뜻한 섬에 도착해서 선글라스를 끼고 바나나를 까먹고, 해먹에 누워 칵테일을 마시는 마지막 장을 볼 때마다 행복했다. 남과 다름을 알고, 정말 행복한 일을 찾아 각고의 노력을 하는 파블로를, 머리가 굵어져서는 존경하게 되기도 했다. 계몽사의 전집류는 이것 말고도 있었다.

검정 서류 가방을 들고 다니던 외판원 아주머니가 집에 들르고 며칠 후엔, 『컬러 학습 대백과』(이 책은 내가 읽었던 때도 아주 촌스러운 책이었다)나, 『어린이 한국의 동화』(「은혜 갚은 호랑이」의 강건하고 거침없는 그림체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후에 검색해 보니 시사만화 ‘코주부’로 알려진 김용환 삽화가의 작품이었다고 한다)가 배달되었다. 새 책이 온 날, 그것을 순번대로 책장에 꽂는 일은 내 차지였다.

      

좀 더 명랑하기를, 박식하기를, 선조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책을 읽으며 자랐다. 엄마가 나를 위해 고른 책을 읽으며 작고 단단한 세계를 만들었고,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주고받는 동질감이 얼마나 따뜻한지 아는 사람으로 컸다.

엄마가 새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책의 지은이가 이런 시구도 썼었노라고 넌지시 건네 볼 작정이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중     

    

그리고 엄마에게 이 시구가 담긴 초콜릿색 시집을 선물해야지.          



2018.2.8.




온실과 난전

온실과 난전이, 어제와 오늘이 섞인 일기를 씁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