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폭을 좁히기로 선언함

오래도록 묵혀뒀던 ‘엄마’라는 응어리에 대해

by Yowtham

고3 여름 가장 가고 싶던 대학 수시 실기를 거하게 망쳤다. 심한 긴장 덕. 워낙 간이 렌틸콩만 해서 말이지. 기분이 정말 좋지 않은데 엄마는 끝나자마자 어디로 오라며, 뭐가 있으니 너가 피아노를 쳐야 한다며 닦달을 했다. “엄마 나 정말 오늘 기분이 좋지 않아” 라는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았다. 물론 엄마의 그런 성격을 이해했지만 그날은 유독 가슴이 너무 답답해 미쳐버릴 지 싶었다. 말로는 잘 표현이 안되는 답답함의 정도였다.


오래된 5층짜리 아파트에 살 때 수압이 약해 모터를 틀었어야 했다. 여름날 밤 늦게 들어오면 그 모터소리 시끄러워 엄마가 깰까 찝찝해도 그냥 잤다. 그렇잖아도 이런 저런 일 고단한데 잠까지 못 자면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넘치는 배려였나보다. 그걸 두고 엄마는 참 넌 게으르고 더럽다 했다. 한량이었던 아빠를 닮을까 노심초사하던 것 이해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라 아무 말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나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왜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거까지 이해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 엄마는 이런 말을 들으면 “웃기시네. 핑계대지 마.” 하겠지만.


10년 전 쯤 엄마와 대화하다 너가 열심히 안해서 그딴 대학 간 거라고 했을 때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때부터 마음의 문을 본격적으로 닫았다. 그럼에도 자식된 도리 열심히 하기로. 입시 당시 나의 심리상태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엄마는 알 길이 없다. 본인의 생존이 바빴다. 정말 마음이 괴롭지만 방학때면 좁은 연습실에서 10시간 넘게 있던 게 나의 너무나 심각한 최선이었는데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라. 엄마 기준에는 그렇다.


4년 전 지병을 발견했다. 희귀난치병을 얻었어도 엄마는 그래도 치료받을 수 있으니 됐지라고 했다. 처음 아산병원 갔을 때도 혼자 갔다. 년에 한 번 대장내시경 보호자로 가는 것도 피곤하다고 귀찮다고 툴툴대셨다. 병을 진단받을 당시 퇴사하고 쉬던 중이었고, 약이 적응될 쯤 딱 맞춰서 직장을 구했다. 엄마는 그 상황을 두고 좀 열심히 구직을 하라며. 엄마는 내가 아픈 것보다 직장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나는 딱 맞춰서 구해질 것을 믿었다만. 오히려 가족보다 더 가족같이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지금까지 버텼다. 내 쓸모를 대강이라도 아는 사람들.


다니던 한의원에 엄마를 닦달해 끌고 갔다. 70만 원 넘어 약도 해드리고. 카운터를 보시는 분이 원장님 사모님이신데, 엄마한테 “아드님이 너무 열심히 사시는 거 같아요.”라고 하니 “아니에요. 다들 그정도는 살아요.”하셨다. 그 사모님은 누구의 소개로 내 기고문과 글들을 읽고, 내가 연주한 음악을 들으니 가슴이 뜨거워 새벽 세 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젊은 분이 이러기 쉽지 않은데,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며. 그런 말을 들어도 엄마는 기본적으로 내가 조금 모자란 사람이다. 학교도 허접, 직업도 정확히 뭐하는지 모르겠을테니 남들에게 자랑할 수도 없고. 내 글을 읽고도 “야, 실명 쓰지마. 괜히 그 사람들에 시비잡히면 어쩔려 그래?” 하시는 분. 중요한 내용을 읽을 능력은 미안하지만 없으시다.


지병 말고도 몸이 괴로워 검사를 받기로 했다. 엄마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 같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로 되어있었지만, 따로 가자 했던 이유는 더 스트레스가 될 것 같아서였다. 치료를 기다리던 중에 먼저 진료 보고 간 엄마에 문자를 넣었다. 엄마는 병원서 뭐라냐고. 그랬더니 이렇고 저렇다며. 본인이 심각하다고 생각을 하셨다. 그 심각한 수치의 절반인 나는 당장 입원하란다고 하니 집에 가서 전화하라며. 그냥 가는 길에 전화했더니 대뜸 하는 말. 오늘 운전하고 병원 갔는데 얼마나 비가 쏟아졌는지 집에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며, 너무 힘들었다며. 하도 기가 막혀서, 아들이 심각하다는데, 병원서 입원까지 하라는데 지금 그런 말밖에 할 게 없냐고 거의 난생 처음으로 섭섭함을 내비췄더니, 자신도 심각했다며. 바로 전화를 끊었다. 아 참,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지 싶어서.


때에 맞춰 잘 독립해 나왔구나 싶었다. 엄마도 35년간 너무 독특한 나와 사는 게 고달팠을테니 혹 하나 떼는 게 낫겠거니 싶기도 했다. 엄마 혼자 살아남기도 버거운데 굳이 혹 하나 달려 있으니 얼마나 인생 고달팠겠나.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도 잘 했다. 어렸을 적 학교에서도 모자라 교회라는 간판 밑에서까지 따돌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할 때도 예수 안 버리고 지금까지도 그런 건 일종의 은혜였지만, 심각한 몸부림이 있었다. 생존본능이었달까. 누구도 편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게 사실. 교회 어른들은 내 별난 성격이 문제라 했다. 지금 보니 맞는 말이다. 다만 그 어른들도 정상은 아니었다. 상처투성이였다. 들어보니 지금도 불쌍하게 사는 듯하다.


굳이 그 교회 사람들 얘기를 나에게 꼬박꼬박해주기에 언젠가 나는 별로 유쾌하지 않다고 했더니, 그래도 “엄마 친구들이잖아”하시니 함구했다. 부모에게도 우선순위가 못 된 자식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려나. 한편으로는 엄마의 판단이 정확하다. 별 쓸모가 없는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좀 조용히 살고 싶다. 인생 처음부터 너무 주변이 시끄러웠다. 35년만에야 시끄러움에서 아주 조금 벗어났다. 대신 온 나라가 시끌벅적이다. 소음은 운명인가보다.


어린 주제에 겁도 없이 이해의 폭을 너무 넓힌 것이 실수였다. 한번쯤은 제대로 마음의 응어리를 풀면서 지랄발광을 했어야 하는데, 엄마가 너무 안쓰럽고 불쌍해서 그러진 못했다. 나는 이해하지만, 나를 이해할 사람은 없다. 그나마 내가 징징대는 친구 하나. 애 둘 아빠인 그도 너무 피곤할 것. 지금도 누구에게 이해를 받는 게 너무 어려운 일. 다들 나더러 이해를 해달라고 난리다. 근래는 누구든 연락을 잘 받지 않고 있다. 근래 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 이는 나에게 물건도 던지고, 이따금씩 인사도 대놓고 무시하고, 말도 제멋대로 하며, 온갖 난리를 부렸다. 본인 왈 질투라 했다. 나는 그것은 사랑이 아닌 가짜감정이라 했다. 나를 감정적으로 괴롭힌 사람까지 나는 상담을 해줬다. 그 사람을 주에 한 번은 보는데, 화가 나서 너무 괴롭다.


이제는 이해의 폭을 줄일 것이다. 살려면 그렇게 해야할 지 싶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려면. 죽어도 좋지만 아직 때가 오진 않은 듯하여.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저 세상이 더 행복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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