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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예 May 31. 2019

불안해서, 산티아고 순례길 (1)

최종 학력 초졸, 대안학교 졸업생의 불안해서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유예

[대안학교 졸업생, 예술가, 활동가, 페미니스트, 아이돌 덕후, 비장애형제...]

나의 특징들은 나의 삶에 좌표를 콕콕 찍어준다. 찍혀진 작은 점들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져, 원형 궤도의 안내자가 된다. 모든 사람들은 점에서 점으로, 다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그리는 궤도가 당신의 궤도와 만나는 것, 그것은 충돌이 아니라 화합이자 환대이기를 기대하며, 멀리 떨어져 자기만의 궤도를 돌고 있는 행성들을 찾아다니는 재미에 살고 있다.








나 여기 왜 왔냐

순례자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를 가지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다. 순례길의 역사에 걸맞게 걷다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시 종교적인 이유로 순례길을 찾아왔다. 영국에서 온 아저씨 Ewen은 퇴직한 후 동네 성당에서 일하다가 예수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 순례길을 찾았다고 했다. 내 이름을 몰라 줄곧 나를 ‘아가씨’라 불렀던 한국인 세 분도 성당에서 함께 왔다고 했다. 다른 이유로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도 물론 많았다.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하기 전, 마지막 여행이라 생각하고 찾아온 한국인 청년들도 있었고, 단순히 운동을 좋아해서 왔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순례길을 두 번, 세 번 째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전의 순례가 너무 좋아서 다시 찾아왔으나, 전과는 또 다른 경험을 얻고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 왜 왔어요?’라는 질문에 간단명료한 대답을 내놓았지만, 나는 누가 나에게 제발 이 질문만은 해주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진짜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순례 초반에는 하루 종일 ‘나 여기 왜 왔냐…’라는 질문만 해댔다. 이 질문은 오르막길을 앞두고 있을 때 짧은 욕과 함께 던지는 실소이기도 했고, 내가 선택해온 것들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기도 했다.

완만해보이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은 오르막길.



반갑지 않은 손님

나에게 공황발작 증세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작은 작년 가을 동네 평상에 누워있을 때였다. 갑자기 땅속 아주 깊은 곳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집까지 걸어가는 상상을 하면 할 수록 집에 도착하지 못하고 영영 죽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종종 일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음악 하는 친구의 부탁을 받아 축하공연을 할 일이 생겼다. 혹시 몰라 청심환을 두 알이나 먹고, 리허설 무대에 올랐다. 걱정을 아주 많이 했지만 침착하게 잘 했다. 그러다 본 무대에 올라가기 일보 직전, 어깨 끈이 풀려 기타가 바닥에 쿵 떨어졌다. 다행히 아주 작은 흠집이 났지만 가빠진 심장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백스테이지에서 가쁜 숨을 고르던 나는 친구에게 공연을 못 하겠다고 말했고, 엉엉 울면서 집으로 걸어왔다. 나에 대한 원망과 실망이 내 몸을 잠식했다. 집에 돌아와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내고, 달달한 칸초를 하나 먹고 한 시간 정도 자니 두근대던 심장은 거짓말같이 진정됐다. 내 몸과 마음은 제발 쉬게 해달라고 나에게 계속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 위의 불청객, 미친 자갈들

 

격하게 쉬어야겠다 생각했다. 쉼이란 무엇일까? 침대 위에 누워서 하루 종일 넷플릭스와 왓챠를 번갈아 보는 것이 쉼일까? 맛있는 걸 먹는 것?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는 것? 나는 진짜 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나를 부담스럽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정확히 파악할 상태가 되지 못했다. 때문에 나는 무작정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모든 게 반대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언어도, 시차도, 사람도, 날씨도. 검색을 해봤더니 요즘 치앙마이 한 달 살기, 동남아 일주, 북유럽 투어 등이 유행이었다. 그 중에서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마음이 갔다. 여행을 다녀오면 왠지 공황장애가 ‘치료’되어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다. 일단 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 모든 것들을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여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공황발작이 심해졌다. 하루에도 두어번씩 나타났다. 매번 비닐봉지를 들고 뛰어가는 나를 보는 친구들은 어찌할 줄 몰랐고 나도 마찬가지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몇 달 전부터 약속한 이벤트를 파토냈고, 중요한 작업들도 다른 친구에게 넘겨버렸다.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병원에 갔다. 링겔을 맞고 약을 받았다. 선생님은 왜 공황장애가 나타난 것 같냐 물어보셨다. 나는 어렴풋이 답을 알고 있었다. 나는 농담 삼아 "제가 대안학교 모범생이라 그래요"라 말했다. 대안학굔데 모범생, 열등생이 있겠냐만은 나는 우리 학교의 교육 목표에 꽤 부합하는 학생이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모범생 되기’를 좋아했고, 그 내용들을 진심으로 믿었다.


한참 남은 숫자


신념과 욕구 사이

순례길을 걸으며 내가 살아온 스무 해의 궤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역시 학교를 다닌 일이었다. 나의 학교는 나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해준 고마운 장소다. 학교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나에게 새로운 것을 배워보라 제안해주었다. 나는 그 일들이 참 좋았고, 열심히 했다. 친구들은 탈핵, 페미니즘, 청소년, 젠트리피케이션 등의 주제가 수업시간 중에 나오거나 발표나 발언을 할 일이 있을 때 자연스레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들은 ‘네가 그거 좋아하잖아’, ‘네가 그거 잘 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들이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고, 기분 좋은 책임감으로 맡은 일들을 척척 해나갔다. 그러다 졸업을 몇 달 남기고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빵 터져버렸다. 내게 주어진 역할도, 쌓여 있는 일들도 다 해낼 자신이 없어졌다. 학교를 안 나가고 지각을 일삼았다. 변하는 나를 보며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하나하나 너무 싫었다. 변하는 내가 싫었지만 변화가 필요했고, 방법을 잘 몰랐다. 결국 선생님들의 팩트폭격으로 계몽된 나는 졸업 막바지에 원래 궤도로 돌아왔다. 나는 내가 겪고 있는 문제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내 일이 나를 지치게 하고, 세상의 더러운 면을 보면서 분노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해결할 마음이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이것들은 내 삶을 움직이게 하는 신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신념보다 나의 욕구를 들여다보는 순간, 나는 도태될 것 같았다.





순례길 다이어트?

신념이 욕구를 지배하는 것. 이 현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나의 몸에 대한 것이었다. 여행 출발하기 전 구글링을 조금 해보니 순례길 다이어트에 대한 글들이 많았다. 매일 여덟 시간씩 걸으니 당연히 살이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게 글들의 요지였다. 내심 기대를 했다. 짠 하고 바뀐 모습으로 서울에 돌아와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길에서 만난 친구들과 매일같이 와인과 맥주를 마시고, 힘들면 홀린 듯이 초콜릿을 부어 대니 살이 빠지기는 커녕 오히려 쪄버렸다.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나의 감정선은 ‘여기까지 와서 살 생각을 하고 싶냐?’는 분노로 곧장 이어졌다. 결국 나는 ‘욕구하는 나’를 갉아먹는다. 나의 이 생각 습관은 아주 오래되고 낡은 것이다. 페미니즘을 알게 된 후, 외모 지상주의, 여성들에게 강요되는 꾸밈노동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어릴 적 친구들의 놀림이 한 결로 합쳐지면서 나는 말 그대로 ‘각성’을 했다.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한 활동을 열심히 했고, 내 주변을 바꿔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아름다워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이런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받은 충격은 아주 컸다. 이상만 있을 뿐 그 안에서 생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변수들을 고려하지 못했다. 살을 뺄 것인가, 말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그 어떤 실수도 일어나면 안된다는 강박과 함께 '앎의 고통'의 시간을 지금까지 보내고 있다. 글보다는 사람을, 완벽한 사람보다는 실수투성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별미, 메뉴 페레그리노









-> 불안해서, 산티아고 순례길 (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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