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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예 Sep 08. 2019

비장애형제로 산다는 것은

철든 내가 여린 나에게 평생 윽박지르는 일


사실 책 <<나는>> 을 읽었을 때만 해도 큰 동요가 있지 않았다. 내가 비장애형제인가? 싶을 정도로 비장애형제들의 언어를 보아도 다른 세계의 일 같았다. 내 동생의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고, 나의 부모가 내가 장애형제를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소홀하거나 혹은 더 많은 기대를 걸지 않도록 노력해오는 모습을 보아서였을 수도 있다.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정말 불현듯 부모에게 진짜 진짜로 서운해서 눈물이 다 난 날이 있었다. ‘왜 엄마는 내가 열 번 잘했을 때는 아무 반응이 없다가, 00이가 한 번 잘했을 때에는 페북에 글을 올리지?’, ‘나는 저 시험 94점 받았는데, 왜 00이는 간신히 합격했다고 좋아하지?’, ‘나는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누군가의 도움 없이 집까지 오는데, 왜 00이가 힘든 일을 겪었을 때에는 데리러 가주지?’, ‘왜 내가 밖에서 밥 사 먹을 때는 돈을 안 주고 00이가 사 먹으면 돈을 주지?’

그러나 생각은 3초 이상을 가지 않았다.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엄마 아빠는 잘못한 거 없어’, ‘진짜 철없다’ 이런 생각들이 서운함을 덮었다. 서운해서 울다가, 우는 내가 어이없어서 웃다가, 다시 울다가. 그랬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부모의 입장으로 변명과 해설을 붙이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러나 그 마음들이 거기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다섯 살 즈음에, 그보다 더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고 느꼈던 마음의 모양이 아직 기억난다. 첫 번째 사진에서 동생과 내가 인형을 각각 네 마리씩 안고 있었는데, 두 번째 사진에서는 내가 인형을 전부 가져가서 풀이 죽은 동생이 인형을 고작 한 개만 안고 있었다. 사진들을 보며 내가 운이 좋아서 동생의 어떤 것들을 전부 가져가 버린 듯 해 느껴졌던 죄책감이 아직도 기억난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동생을 정말 아끼고 사랑했다. 반려동물처럼 물고 빨았고, 동생이 아프면 내가 속상했고, 동생의 미래까지 대신 고민했다. 이런 날이 있었다. 동생이 친구들과 싸우고 나서 내가 수업하고 있던 교실로 울며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나는 수업 도중에 나가 동생을 안아주었다. 이윽고 상담실에 데려가 종이 한 장을 펼치게 하고 너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했다. 그림을 다 그린 후에는 종이를 사분할로 나누어 동생이 감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도록 각 칸에 떠오르는 감정을 작성하도록 했다. 어깨너머로 보았던 상담 프로세스를 따라한 것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형제들과 치고받고 싸우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내 동생이 나에게 소리 지르고 화내기를 바랐다. 그게 왠지 ‘정상적인 형제’의 모습일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가끔 동생에 대해 세게 말하기도 했다. 죄책감은 침대에 누웠을 때 파도처럼 찾아왔고, 다음 날에는 괜히 동생에게 잘해주었다. 나만 나쁜 누나가 되고 동생은 계속 불쌍해지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자주적이고 당당한 삶을 살리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왔다. 그래서 동생과 나를 끊임없이 연결 짓고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장애가 있다는 건 죄가 아니라고 말하고 다녔다. 동생의 존재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해서 멋진 비장애형제의 모델이 되겠노라고 다짐했다. 모순적이게도 정말 힘든 건 이런 것이었다. 내 안에 있는 서운함, 죄책감, 소외감, 징징거림, 지침, 투정과 같은 단어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묶어 버려 버렸다. 그리고 ‘훌륭한 비장애형제의 쓰레기’ 딱지를 붙여 길가에 내놓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측은하다. 아주 측은하다.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던 게 슬프다. 내가 내 편이 되어주지 못했던 것, 어리고 순한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른 체한 게 너무 슬프다.


사실 나는 동생을 괴롭힌 친구들의 머리를 세게 후려치고 싶었다. 사실 나는 그냥 나쁜 누나가 되어도 좋았다. 사실 나는 엄마의 바지를 붙들고 칭찬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사실 나는 나에게 장애가 없어서 다행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동생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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