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4년 후, 우수사원이 되기까지

나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by 그레이스

12월 둘째 주,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올해의 마지막 출장이자 이벤트를 마쳤다. 보통처럼 영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연말까지 미국에서 휴가를 보내는 중이다.


외국은 11월 말부터 다들 휴가를 가기 시작한다. 12월 중순이 지나갈 즈음에는 거의 모든 일이 멈춘다. 그래서 늘 연말은 일년 중 가장 널널하고 마음이 가벼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 달이다.

올해는 왠일인지 휴가 가기 직전까지도 일이 끊이질 않았다. 중순까지 2026년 예산안을 제출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내년 초에 진행될 이벤트들이 있어 계약서를 검토하고 여러 행정 업무를 완료해야 했다.


휴가 첫 주였던 이번 주는 오전이나 저녁에 틈틈이 일을 해두고, 나머지 하루를 자유롭게 보내는 식으로 반쪽 짜리 휴가를 즐겼다. 비록 일하는 시간은 짧지만 마음이 온전히 쉴 수 없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목요일은 올해의 마지막 *올핸즈(all hands)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어차피 할 일도 있고, 오전 미팅이라 딱 이거까지만 들어가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씻기도 전에 대충 후드를 집어 입고 카메라를 켜고 참여했다.


*미국은 전사 회의를 올핸즈 (All hands) 미팅이라고 부른다. 모든 선원이 배에 타야한다는 신호인 'all hands on deck'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내가 미팅에 들어온 걸 본 상사가 미팅 끝까지 남아줄 수 있냐는 슬랙 메시지를 보내왔다.


오브 코스!!! 당연하쥬!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긴 했는데. 뭔가 안 좋은 소식이 있는건가 싶어 살짝 불안해졌다. 긴장한 채로 내년 방향성에 대한 사장님의 업데이트와 리더십 발표를 끝까지 들었다.


이제 우수사원 발표 순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별다른 내용이 없는데 왜 남으라고 한걸까?


궁금해하던 찰나... 갑자기 화면에 내 사진이 등장했다.


예? 내가 12월의 위너(우수사원)로 선정되었다고요?!

우수사원2.png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서프라이즈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진심으로 놀랐고,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꼬질한 내 모습이 살짝 민망했다. 하지만 민망함도 잠시, 인사 팀장님이 읽어주는 선정 이유를 듣는데 정말 감동적이었다.


I'm pleased to recognize Grace for her execeptional performance and contribution in our field marketing operation and efforts for the year and the past year. Grace was new in this role as a field marketing director and had no prior experience in this area.


Nevertheless, she embraced the challenge without hesitation and demonstrating the initiatives and growth mindset and we expanded our presence and industry and it was very critical strategic priority for us. She took the initiative and as a result one of our main prospective customers come out of her efforts.


In general, the events generated significant new business opportunities and we would like to say thank you for the whole marketing team but Grace was a very important leader in this direction.


Grace embodied all the qualities we celebrate. Step out of your comfort zone, commitment for the continuous learning, reselience to face new challenges and most importantly deliver meaningful business results.


내 상사가 써서 전달해준게 분명했다. 자신감을 잃을 때마다, 작은 실수를 자책할 때마다,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상사. 마치 상사가 나에게 직접 얘기해주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뜨거워졌다.


올해 4월, 새로운 부서를 맡으며 직속 보고 라인이 지금의 상사로 바뀌었다. 상사가 부임한 건 작년 5월이지만 제대로 함께 일한건 약 8개월 정도인 셈이다.


그 사이 운 좋게도 네 번이나 직접 얼굴을 봤고, 따로 식사도 하며 가까워졌다. 업무에 있어서는 존경할만한 리더이자, 인간적으로도 참 따뜻하고 좋은 분이다.


사실, 외국 회사에서 일하며 우수 사원으로 선정된건 세번째다. 2017년 두바이에서 다녔던 회사에서 한 번, 2021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한 번, 그리고 현재 회사에서 또 한 번.


그 중에서 이번이 가장 특별하고 소중한 이유가 있다.


4년 전, 영국에서의 첫 직장에서 만난 CMO를 따라 지금 회사로 이직을 했다. 6개월 후, 나를 데려온 그 CMO는 해고 되었고, 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설상 가상으로 당시 CEO의 낙하산 아들이 내 상사가 되면서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23년과 24년은 지옥이었다.


그 당시 여러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굳이 이 회사로 이직한 스스로를 수도 없이 원망했다. 그렇게 우울증이 찾아왔고, 분노와 무기력이 나를 가득채웠다.


이렇게 살다가는 정말 미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아주 오랜만에 했다. 나름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처절하게 노력했지만, 길고 껌껌한 터널을 벗어날 수 없었다.

루이스칸이 설계한 솔크 연구소


사회 생활 13년 중 가장 힘들었던 2년의 시간이었다.


여러 번의 좌절에도 나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올해 3월, 나는 끔찍한 상사에게서 벗어나 지금의 상사와 직접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상사는 나에게 새로운 부서를 맡겼다. 팀원 한 명 없이 1년 동안 15개의 이벤트를 했고, 12번의 출장을 다녀왔다.


지금껏 재택 근무를 하며 외딴섬에 갇혀 있던 내가, 이벤트를 매개로 많은 동료와 리더들 그리고 고객을 만났다. 나에게 기회를 준 만큼 좋은 성과로 보답해야 한다는 부담과 간절함이 컸다.


처음 맡아보는 직무이기도 하고, 우리 회사에서도 처음 생긴 부서다보니, 여러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하지만, 나의 간절함은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냈다.


조금씩 작은 성취를 맛보았고, 그렇게 나는 모든 KPI에 있어 목표를 초과 달성하고 기록을 경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벤트에서 굵직한 계약들을 소싱했고, 이 중 전략적으로 중요한 계약이 지난 주 성사가 되었다.


매일 퇴사를 고민했던 내가 이 회사를 다닌지 이제 곧 4년이 된다.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었지만 가장 좋은 성과를 내는 경험을 했고, 우수사원으로 선정되었다.


세상에나. 이런 날이 올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난 9월 상사와 점심을 먹으며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늘 5가지의 장벽과 맞서 싸우며 일한다고.


문화, 인종, 언어, 기술 그리고 성별*.


*참고로 이 다섯가지로 인해 차별을 받는다고 느껴본적은 단 한번도 없다. 다만, 엔지니어들이 주도하는 미국의 IT 기업은 심각한 (미국인) 남초 집단이다. 그래서 나처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동양인 여자 마케터 (비 기술직) 의 입장에서는 이 하나하나가 장벽이다.

석양이 지는 산디에고 퍼시픽 비치

물론 우수사원으로 선정되지 않았더라도, 나는 이전과 똑같이 열과 성을 다해 일했을 테다. 구태여 회사가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나는 죽음의 계곡에서 살아나온 스스로를 충분히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4년간의 마음 고생과 몸 고생 그리고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걸 객관적으로 증명받는거 같아서 뿌듯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 마음에 조금의 여유가 생긴다.


지금껏 거쳐온 모든 고난의 순간들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려움의 크기만큼 성장한 것 같다. 이제 더이상 지난 선택을 후회하거나 습관처럼 과거를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무소의 뿔처럼, 그저 앞을 보고 나아가기로 다짐한다.


내가 브런치 작가를 신청한 이유는 <한국인 팀장, 미국 회사 생존기>라는 매거진을 연재하고 싶어서였다. 10여 년간 운영하다 멈춘 네이버 블로그, 다시 글을 쓸 새로운 동기가 간절히 필요했다.


'첫 화'를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마치 지난 4년에 깔끔하게 마침표를 찍는 것 같았던 이 순간을 새로운 시작으로 삼아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미국 회사에서 경험했던 다양한 에피소드와 앞으로 이어갈 생존기를 기대해주시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