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로맨스를 그리려는 어설픈 강박 (유해진/김희선/로맨틱 코미디)
감독: 이한
출연: 유해진, 김희선, 차인표, 진선규, 한선화
각본: 이병헌
장르: 로맨틱 코미디
상영시간: 118분
제과회사 연구원 '치호(유해진)'는 집과 회사만을 오가는 규칙적인 일상 속에서 오로지 '과자' 하나만을 보고 살아간다. 회사에서는 가장 유능한 직원으로 통하지만 현실 감각은 제로에 가까워 얼핏 보면 바보처럼 비치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그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 하고, 오직 혼자만의 삶을 추구한다.
그런 '치호' 앞에 나타난 대책 없이 밝은 여자 '일영(김희선)'은 매사에 직진일 정도로 적극적이고, 거침 없이 솔직하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통통 튀는 매력의 그녀는 매일이 똑같았던 '치호'의 삶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다. 한번의 상처를 겪었던 '일영'은 순수함의 결정체와도 같은 '치호'에게 끌리고, 생애 처음으로 달짝지근한 감정에 빠진 '치호'의 심장도 조금씩 '일영'에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달짝지근해: 7510>은 촌스럽지만 귀엽고, 올드하지만 친숙한 중년들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다. 중년의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로맨스 작품들이 대개 불륜이나 치정을 밑바탕에 두고 있던 것과 달리 두 남녀 주인공의 순수한 멜로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약간의 새로움을 점하기도 했다. 사회비판적 이슈를 다룬 현실적이고 어두운 작품들이나 자극적인 범죄 액션물과 달리 가볍고 착한 이야기를 담았기에 현 영화 트렌드에 피로감을 느꼈을 관객들이라면 충분히 선호할 법한 작품이다.
귀엽고 어리숙한 '유해진', 사랑스러운 '김희선'의 매력은 평범한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슬랩스틱 코미디와 로맨스를 오가는 두 사람의 케미도 훌륭하다. 특히 '유해진'은 카메오로 등장하는 '염혜란', '임시완', '현봉식' 등 짧은 분량의 배우들과도 맛깔 난 티키타카를 선보이며 짧게 치고 빠지는 장면에서의 웃음 타율 또한 나쁘지 않다.
다만 배우들의 연기력에 기댄 채 뻔하고 낡은 이야기를 답습하고 있다는 건 여전히 아쉽다. 중년 로맨스를 주제로 한 작품이라 의도적으로 올드한 요소를 배치한 것일까? 특유의 '말 맛'으로 정평난 '이병헌' 감독의 매력이 각본에서 크게 두드러지지 않고, 아재개그랍시고 가미된 대사들은 고루할 지경이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치호'의 행동, '유해진'과 카메오 출연진들의 호흡 정도만이 제역할을 해낼 뿐 인물들의 대사가 가져다주는 재미는 부족하다. 특히 '차인표', '진선규', '한선화' 등 조연 캐릭터들은 철저히 주인공을 위한 도구로만 활용된다. '이병헌' 감독의 작품들에서는 조연 캐릭터의 쓰임이 한정적이지 않다고 느껴 왔는데, <달짝지근해>에서는 각본에만 참여한 탓인지 뛰어난 배우들을 한정적으로만 사용해 아쉬움이 컸다.
'유해진'이 연기하는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이라면 훨씬 더 재기발랄하고 유쾌한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착함'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강박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스토리를 제어하고 있는 듯한 안정감 때문에 각본의 매력이 반감된 듯하다. 그래도 계단에서 넘어지는 '일영'을 받아주지 않는 '치호'나 '일영'을 업고 가다 함께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신처럼 틀을 깨는 몇몇 장면들은 '이병헌'스러웠다.
물론 코미디 장르만을 표방한 작품은 아니기에 결과적으로 더 중요한 건 두 주인공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달짝지근해>에 내재된 올드한 색깔은 '치호'와 '일영'의 로맨스에서도 유효하다. 마치 노골적으로 레트로를 지향한 것처럼 극에 등장하는 소품이나 배경들은 요즈음의 시내상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 '치호'가 끌고 다니는 녹색 프라이드 자동차나 데이트 장소로 등장하는 '김밥천국', 어플로 송금을 하는 시대에 굳이 500원을 거슬러 주겠다는 행동까지. 그 흔한 SNS나 메신저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가 지금 2003년에 나온 영화를 보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로맨스 이야기의 구조도 클리셰를 그대로 따른다. 우연한 장소에서 만난 두 남녀가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계속 엮이고, 설렘이 몽글몽글한 썸을 타다가 연애에 골인. 그리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물로 인해 눈물을 머금고 이별을 하지만,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재결합을 한다는 결말까지. 너무나 많이 보아 왔던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가장 감동적이어야 할 '치호'의 공개 고백 신은 기대만큼의 감정을 끌어올리지 못한다. '일영'은 그의 고백을 뒤늦게 접하게 되는데, 이때 발생한 시간 차가 감정선을 끊어버리는 역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꼭 '치호'는 경계성 지능 장애에 가까운 인물로, '일영'은 미혼모로 설정해야만 했을까. 40대라는 나이는 이미 쓰디쓴 인생에 한참을 데여 풋사랑을 시작하기에 늦은 시기라는 데는 동의한다. 이 때문인지 중년 남녀가 순수하고 착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결함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처럼 비쳐져 씁쓸했다. 극중 '치호'는 형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고, '일영' 역시 치근덕거리는 직장 상사나 쉬운 여자 취급하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한다. 따뜻하고 다정한 '치호'와 편견 없고 당찬 '일영'이 서로에게 끌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각자의 아픔을 가진 남녀가 서로를 보듬어줌으로써 사랑을 꽃피우는 따뜻한 이야기이지만, 이게 매력적이거나 세련된 소재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로맨스와 코미디에만 집중하면 좋았을 텐데, 사회적 약자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의식을 확장하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스토리가 돼 버렸다.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자극할 정취가 깔려 있고, 올드한 유머 또한 특정 세대에게 먹힐 만한 여지가 있다. 스토리의 여러 흠결을 배제하더라도 '유해진'과 '김희선'의 캐릭터 소화력과 이름값이 충분히 드러나 영화의 단점이 일부 보완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지나칠 정도로 착하고 무해한 로맨스만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 마치 짜 맞춰진 것처럼 움직이는 이야기와 캐릭터들은 그저 작위적으로 비친다. 새롭고 달짝지근한 맛의 영화라기엔 그저 오래되고 익숙한 맛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