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팅과 캐릭터의 힘, 그리고 성장캐 혜리 (빅토리 개봉/빅토리 시사회)
감독: 박범수
출연: 이혜리, 박세완, 이정하, 조아람 등
장르: 드라마
상영시간: 120분
개봉일: 2024.08.14
춤출 때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거제 소녀 '필선(이혜리)'과 '미나(박세완)'. 번번이 사고만 치는 데다 학 학년을 꿇기까지 한두 사람은 학교 선생님들에게 단단히 찍히고, 댄스 연습실을 빼앗긴 채 화장실에서 몰래 춤을 추는 신세다. 두 사람은 서울에서 전학 온 치어리더 출신의 '세현(조아람)'을 이용해 연습실을 되찾기로 결심하고, 얼떨결에 학교 응원부를 결성하게 된다. 동아리 인원 충족을 위해 아홉 명의 멤버를 모집하는 과정부터 '필선'과 '세현'의 기싸움까지 수차례 삐그덕거리지만, 나름대로 구색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밀레니엄 걸즈'라는 이름의 치어리더 동아리가 탄생하게 된다. 춤을 계속 추기 위해, 그리고 응원부의 존속을 위해 학교 축구부의 승리를 이끌어내야 하는 사명을 맞닥뜨리게 된 소녀들. 치어리딩의 '치'자도 모르던 이들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며 눈부신 응원의 힘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각본도, 연출도, 영상미도 아닌 캐릭터의 힘이 빛난 영화다. <빅토리>처럼 세기말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하이틴 청춘영화의 경우 시놉시스만 보더라도 흐름을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스토리의 작품들이 많고, 특히 십 대들의 꿈과 우정을 주제로 삼았을 경우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쉽지 않다. 특히 본작처럼 메인 갈등 서사가 빈약하다면, 2시간의 러닝타임을 흡인력 있게 끌고 나가는데 힘에 부칠 것이다.
대신 앞서 말했듯이 뻔한 이야기와 개연성의 빈틈을 메우는 것은 캐릭터다. 온갖 개성으로 똘똘 뭉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이들의 연기 앙상블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과 시너지가 있기 때문에 생각만큼 맥이 빠지진 않는다. 작품의 주요 출연진들을 살펴보면 '혜리'와 '박세완'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 배우들이다. 조연 캐릭터들도 꽤나 비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젊고 유명하지 않은 배우들을 대거 기용했다는 건 배역에 최적화된 배우를 캐스팅하는데 주력했다는 의미일 터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캐스팅이 조금 약한 게 아닐까라는 우려가 들기도 했으나 만화책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개성 강한 소녀들로 분한 배우들의 매력적인 감초 연기를 보게 되자 걱정이 쏙 들어갔다. 각기춤 머신부터 태권소녀, 종말론자 햇살캐, 힘숨찐 모범생 등 무엇 하나 평범한 역할이 없다. 하지만 이 배우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들은 온전히 '밀레니엄 걸즈'의 멤버가 되어 작품의 웃음과 활력을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배우들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아다니고, 작은 캐릭터 하나하나까지 살아 숨 쉰다면 결국 작품은 평범한 이야기로도 환한 빛을 낼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작품의 메인 주인공이자 이야기의 중심축인 '필선' 역을 맡은 '혜리'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혜리'는 그를 대세 배우로 만들어준 <응답하라 1988> 이후 이를 뛰어넘을 만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고, 그의 인생캐라 할 수 있는 '성덕선'은 언제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특히 학생 역할을 맡거나 말괄량이 캐릭터를 연기할 경우 매번 비슷한 연기를 한다는 평가를 받을 때가 많았다.
이미 소재에서부터 '성덕선'과 '응팔'을 떠오르게 만드는 <빅토리>는 '혜리'에게 독이 되기 쉬운 영화다. 시대적 배경이 다르긴 하지만 90년대 복고풍 영화라는 점에서 레트로 청춘 드라마의 정석과도 같은 <응답하라 1988>이 오버랩될 수밖에 없고, 예고편에서 비춘 명랑한 모습은 '또 성덕선이야?'라는 반응을 불러오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내가 두 시간 동안 스크린으로 감상한 '혜리'의 모습은 '성덕선'이 아닌 오로지 '추필선'이었다. 물론 일부 장면에서 천진난만한 덕선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지만, 작품을 끝까지 감상하고도 '혜리'의 연기가 똑같고 뻔하다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그들은 영화를 제대로 보지 않은 사람들일 것이다.
솔직히 기대 이상의 연기였다. 표준어로 하는 연기도 100% 완벽하게 하지 않는 '혜리'가 과연 경상도 사투리 연기를 거슬리지 않게 소화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걱정했던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사투리를 선보였다. 무엇보다 '필선'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덕선'과 딴판이라 그동안 작품을 통해 보지 못했던 배우 '혜리'의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덕선'에게 선함과 순수함, 엄청난 친화력이 있다면 '필선'은 당돌함과 의리, 그리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주체성을 가졌다. 티저 영상만 보고 그가 영화에서까지 비슷한 캐릭터를 답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 완전한 오산이었다. "혜리가 이렇게 힘이 많이 들어간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는 배우였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필선'이라는 인물의 세계를 완벽하게 표현해냈으며 영화 경험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원톱 주인공으로서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힘도 상당했다.
언젠가 '혜리'가 나오는 드라마들을 보며 '덕선'이야말로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빅토리>를 보고 그 생각을 바로 고쳐먹게 됐다. 더디지만 수없이 노력하고, 천천히 성장해나가는 배우구나... <응답하라> 이후 배우 '이혜리'를 처음으로 달리 보게 만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