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공허했던 이유는, 쓰지 않아서였다

그동안 책을 읽는 척만 했다

by 폴린

나는 한동안 책을 읽는 척만 했다.

매일 가방에 책 한 권쯤은 넣고 다녔고,

나는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정작 끝까지 읽은 책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사람들이 나를 두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 ‘많이 읽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마다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실은 ‘읽는 척만 하는 사람’이라는 걸.


밀리의 서재를 구독한 뒤로는 완독률이 더 떨어졌다.

무료라는 생각에 책을 쉽게 펼쳤고, 그만큼 쉽게 덮었다.

편리함은 있었지만, 몰입은 없었다.

(핑계라는 걸 안다.

그리고 밀리의서재는 충분히 좋은 서비스다. 밀리의 서재 만세)


그래도 올해는 조금 달라지고 싶었다.

이왕 읽는거 책을 끝까지 제대로 읽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 권씩 끝까지 붙들고 읽기 시작하자,

문득 글도 쓰고 싶어졌다.

‘아, 나 글쓰는 거 좋아하던 사람이었지.’






아이를 낳기 전엔 나는 늘 무언가를 적는 사람이었다.

여행을 할 때도, 글쓰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블로그를 쉬고 있을 때도

다이어리에는 항상 적고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를 낳은 후에도 다이어리는 계속 썼다.

그 안엔 일정과 계획만 빼곡히 기록되어있었다.

하지만 글은? 적지 않았다.


글을 쓴다는 건,

긴 호흡으로 나만의 생각에 푹 잠기는 일이다.

오롯이 나와 마주앉아 대화하는 시간이다.

글을 쓴다는 건 그만큼 제대로 ‘각’잡고

나와의 시간을 ‘일부러’ 만들어내야 가능한 거였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나와의 시간을 갖는다는 건,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건,

의외로 내게 큰 용기를 요구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더 외면하고 미뤄왔다.


책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다보니,

당연히 글을 적는 것도 두려워졌다.

대체 뭐부터 시작해야할지, 백지를 보면 깜깜해졌다.

글쓰는 걸 좋아했던 내가,

글쓰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서는,

나는 더 멀리 도망쳤다.






그러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지 책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읽지도 않고 쌓여있던 책들을 비우고 싶었다.


책을 사두면 저절로 지식이 쌓인다고 믿었던 걸까?

나는 이런 책을 읽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읽지도 않고 책을 소유한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던

나의 지적 허영심에 신물이 났다.


책장의 먼지, 읽지 않는 책, 부질없는 허영심까지

같이 정리해버리고 싶었다.


한 권씩 읽고, 덜어내고, 나누기 시작했다.

좋은 책은 몇 번이고 줄을 긋고 읽었다.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듯 천천히 곱씹었다.

그렇게 천천히 읽는, 깊이 있는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쓰고 싶어졌다.


많이 읽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건,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짧게라도 적어보려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매끄럽지 않아도 좋다.

흘러가는 생각 조각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어설픈 문장일지라도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멋진 글을 써내지는 못하더라도,

나는 그저 다시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을 쓸 때에서야 비로소 나는 가장 충만해짐을 느낀다.

그동안 공허했던 이유는,

내가 쓰지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야 다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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