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
1편에 이어 이번엔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론을 써 볼까 합니다.
써 놓고 보니 초보자를 위한 가이드라기 보다는 독서의 원리 정도가 됐네요.
1. 독서도 ‘린(Lean)’원리가 적용된다
교보문고에 있는 <미움 받을 용기>를 보고 “베스트셀러이니 일단 읽어 보자”라고 덜컥 집어 구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수 좋으면 자신에게 딱 필요한 책이라 인생에 많은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집 책장에 재고로 남게 될 확률도 높습니다. 일단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임에 부럽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런 경우 책을 읽는 즐거움 보다는 책을 통해 허영심을 충족하려는 성향으로 인해 낭비만 과중될 뿐이죠. (도요타가 린 방식으로 해결하려던 원리와 똑같습니다)
단순히 즐기기 위한 게 아닌, 내 영혼을 살찌우기 위한 책을 고르기 위해서 필요한 건 내 스스로 ‘필요’를 먼저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필요’가 ‘나에게 부족한 무엇’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나에게 부족했지만 내 스스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읽으면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한두 가지 습관부터 만들어 내고 있는 사람에게만 도움이 될 겁니다. 즉, 내가 어떤 분야를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걸 알아 나가는 데 관심과 재미를 느끼고 있을 때, 그때서야 그 분야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명하다는 책을 마구잡이로 읽어 봤자 절대 마음의 살로 가지 않습니다. 책장엔 재고로 남고, 시간은 불량이 되며, 돈만 낭비될 뿐, 책을 많이 읽는다고 모두 현자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특히나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의 특징이 자신의 수준보다 높은 책을 골라 재미를 못느끼거나 아니면 순간의 재미만을 위한 책을 고르는 경우일 때가 많은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에게 적합한 수준의 책을 찾는 건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책을 읽기 전에 나를 먼저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현재 무엇에 관심 있는지, 내가 진정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누군가 또는 어디선가 그에 대해 좋은 책이 있다는 말을 할 때 집어 들고 읽는 게 중요합니다. 그때서야 인생의 방향이 잡힌 상태에서 그걸 구조화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해 주는 힘으로서 책의 역할이 발휘됩니다. 그래서 앞의 글에서 "책을 고르는 건 꿈을 찾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했던 것입니다.
2. 책은 재미있고 봐야 한다
“나는 여전히 책보다 드라마를 보는 게 좋다”라는 사람이라면, 유전적으로 삶의 부조리나 인생의 의미를 인지하지 못해도 그럭저럭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는 단순한 사람이거나, 아직은 그 때가 오지 않은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전자일 경우 소위 전형적인 필부로서 역사 책에 “군사가 5만명”, “백성이 10만명”으로 불릴 때 그 중 한 명으로 남게 될 뿐입니다. 하지만 자존감 있는 인간은 그런 허무한 결론을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영화나 드라마가 좋지만 나이가 들수록 뻔한 스토리에 피상적인 모습만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에 실증을 내게 돼 있죠.
허름한 요양원에 계신 우리 외할머니를 뵈면 항상 이런 말씀으로 의미 없고 지루한 삶의 결론을 내리십니다. “왜 이렇게 안 죽어…”
저는 누구에게나 그런 성향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언젠가는 드라마에서 벗어나 책으로 넘어 가라고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재미있어 할만한 책을 고르는 게 우선입니다. 드라마보다 재미있다고 느끼는 책을 찾는 것, 그건 어쩌면 성인이 가져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인간을 지적으로 성숙하게 만들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꼽자면 하나는 커다란 시련을 극복하며 얻는 깨닳음, 나머지 하나는 타인의 그것을 자기화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인 책을 읽는 것이라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
참고로 제가 책에 눈을 뜨고 독서에 습관을 들이기 시작한 건 30대 중반이 넘어 읽은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였습니다. 2천년 전 이야기 그 자체로 재미있었지만 유럽 역사의 경이로움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아랍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로 관심이 넘어 갔으며 나중엔 한국과 일본의 역사까지 읽게 되었습니다. 그 후 유럽 여행을 하며 로마의 건축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고 건축, 미술뿐 아니라 지질학도 재미있는 학문이라는 걸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행의 맛도 달라지더군요.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지성이 확대되는 경험이야 말로 책의 궁극적인 혜택이 아닌가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시작해 사마천의 <사기, 열전>을 읽으며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인간과 조직의 운영상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와이퍼라는 서비스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대표의 경영 철학까지 이어졌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제 인생을 바꾼 책은 <로마인 이야기> 이전 대학원에서 읽은 <이기적 유전자>였지만 그것이 저의 독서 습관을 만들진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아직 때가 되진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즉, 책을 읽어도 드라마보다 재미가 없다고 느껴진다면 굳이 자책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찾다 보면 언젠가는 드라마를 넘어서는 경지에 다다르지 않을까요? 물론 시기의 문제이긴 하지만 너무 늦으면 안됩니다. 외할머니한테 지금 “니체나 리처드 도킨스를 읽으면 그 안에 답이 있어요”라고 말해 봤자 의미가 없잖아요. 노력해서 빨리 찾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과는 다를 겁니다.
3. 경제성의 원리
마지막은 진짜 초보를 위한 내용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우선 유명한 사람이나 지인, '서울대생 필독서' 같은 곳에서 추천하는 책에 관심을 갖는 것 부터 시작합니다. 그 중에서 끌리는 책이 있으면 일단 골라 보는거죠.
그리고 저의 경우 확실하지 않은 책은 동네 구립 도서관에서 일단 빌려 봅니다. 앞부분을 대충 보고 재미 있으면 사서 보거나 소장가치가 없다 싶으면 그냥 그대로 다 봅니다. 한번에 2권 이상 빌릴 때도 많은데, 재미 없으면 곧바로 반납하고 다른 걸로 넘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굳이 어려운 책 볼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책 읽을 시간이 없어서 못 보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도 그런 핑계를 자주 대니까 할 말이 없지만, 솔직히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겁니다. 경험상 정말 재미있는 책을 골랐을 때는 화장실, 대중교통, 심지어 대중교통에서 사무실까지 걷는 시간만 포함해도 2주에 책 한권은 읽을 수 있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물론 회사 화장실에 가는 빈도와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문제가;;;)
보통 사람에게 책 읽기에 부족한 시간이래 봤자, 그보다 더 재미있는 ‘드라마 볼 시간’, ‘게임 할 시간’이기 때문에 결론은 ‘그보다 더 재미있는 책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되겠네요. 결국 더 좋은 가치를 찾으려는 경제성의 원리입니다.
마지막으로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책에 대한 한 줄 평 정도라도 작성하시길 권해 드립니다. 저는 <로마인 이야기> 이후부터 Google Docs에 한줄평을 작성해 왔는데, 나중에는 저희 딸이 커서 책을 읽을 시기가 되었을 때 길라잡이가 될 수 있도록 ‘추천등급’과 ‘읽을 시기’를 나름대로 매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욱 동기 부여가 되어 좋았습니다.
책의 힘
위 이미지를 copy & paste 하면서 뒤돌아 보니 제가 읽은 글이 로마인 이야기 이후 8년간 120편 정도 였습니다. 10권 이상되는 대작들을 포함해 봤자 160권 정도이니 진정한 독서광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제가 자랑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수준이 높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스스로 내 상황에 만족하고 삶의 의미와 꿈이 명확하다"는 점입니다. 이건 누가 뭐래도 보통 사람들이 부러워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직도 자신의 삶이 덧없고 목적성 없이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태반이니까요. 이건 확실히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잘것 없고 주관적인 만족감임에도 불구하고 자랑삼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운동권이었지만 단편적인 의식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특히 개발자로서 기계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던 제가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아 나름대로 만족하는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앞에서 말한 독서의 원리가 컸습니다. '단지 읽지 말고 스스로 의미를 찾는 데 책을 보완재로 사용하라'는 것.
이렇게 독서 예찬을 펼치는 이유는, 그것이 개인적인 삶의 등대가 될 수도 있지만 헬조선이 되어 가고 있는 이 나라를 보다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 또한 한국인을 인격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식한 군중에게 민주주의는 오히려 지옥이 될 수 있으며 배우지 못한 민중이 제대로 된 리더를 뽑을 수도 없습니다.
그 길을 제도권 교육에서 얻을 수 없다면, 책이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으니 독서 예찬은 단순한 취미에 대한 수필이 아닌 하나의 운동이라고 말씀 드리며 길 글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