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취향에 안 맞는 것을 악하다 비난하지 말라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인생관, 세계관을 확 바꾸는 깨달음의 순간들이 살다 보면 몇 차례 있다. 나를 가두었던 창살이 어떤 통찰에 의해 깨지고 나면, 나는 한 차원dimension을 점핑하여 그동안 n-1차원에 갇혀있던 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내게 있었던 몇몇 통찰의 순간 중 부모로, 교사로 나의 모든 판단기준을 바꾼 깨달음의 순간이며, 나의 글을 통해 교육과 삶을 함께 바라볼 독자들과의 공감과 이해에도 도움이 될 것 같은 한 순간을 여기서 나누고 싶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고통은 선악과를 따먹은 데서 시작된다. 철학적으로 선악과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겠지만, 대학에 들어가던 해에 들은 한 설교에서 나는 적어도 서너 차원은 점핑했겠다 싶은 통찰을 얻은 바 있다. 이후 내 아이들이나 학교 학생들을 대할때 늘 나를 멈춰서게하고 돌아보게 했던 것인데, 그것은 선과 악을 규정하는 새로운 관점에 대한 것이다.
인간을 유혹한 뱀이 말했다.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신다.' 선악과를 먹었더니 정말 그들의 눈이 밝아졌고, 자신들이 벗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몸을 가린다. 창피했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신이 아담을 부르니 그는 두려워 몸을 숨겼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의 잘못으로 돌린다. 신과,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가 모두 깨졌다. 그렇게 된 원인은 인간이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인데, 문제는 그 능력이 신만큼 완전치 못했다는데 있다.
벗은 인간의 몸은 아름다웠지만(선) 스스로 창피하게(악) 느꼈고, 신은 모든 것을 알고 보는데(선) 그 시선에서 피할 수 있다고 착각(악)했으며, 내 옆의 아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선)인데 어느 순간 나를 해치는 자(악)가 되어있었다. 인간이 내린 판단들이 모두 틀렸다.
사람들에게 선과 악은 매우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듯이 한 사건이 시점과 관점에 따라 악이 되었다가 선이 되기도 한다. 도덕시간에 진, 선, 미는 영원히 불변하는 가치라고 배웠는데 생각해 보면 그것들만큼 유행을 타는 것도 없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얻은 능력으로 판단하기 시작한 선과 악은 사실 절대적이지도 불변하지도 않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내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기뻐 소리 지르기도 하고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사건이 내게 '선'하거나 '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판단이 과연 옳을까. 선이란, 악이란 과연 무엇일까.
오랜 생각 끝에 나는 신으로부터 온 것은 선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내 기호에 맞거나 내 불완전한 잣대를 통과해야 선이 아니라 완전한 신으로부터 내게 주어진 것은 선이라고. 그것이 내 바람과 같지 않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내가 싫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말해도 될까. 내게 그런 권리가 있을까. 그 판단은 정말 옳은가.
우리 부모들에게는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다. 그런데 슬프게도 자식들은 하나같이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부모자식 사이에는 기대와 실망, 그로 인한 갈등이 있다. 그런데 그 기대라는 것 말이다. 내가 꼭 부모여서가 아니라, 부모의 입장에서 가지는 자식에 대한 기대가 늘 그렇게 무리한 욕심인 것은 아니다. 그저 평범하고 상식적인 아이라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것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식에 대한 우리 부모의 기대는 정당한 것일텐데 왜 자꾸 문제를 일으킬까. 둘 사이의 입장차이가 갈등이 되고, 그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고통받는 관계들이 있다. 생각해보면 그 기대들이 무리한 것이어서 문제가 된다기보다, 너무 자의적인 것이어서 문제가 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남자의 키를 보지 않는다. 키가 작은 남자여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남자를 볼 때 키를 궁금해하거나 의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 친구에게 엄청 착한 사촌오빠를 소개해주었더니 '미안한데, 너희 오빠 참 좋은데 키가 작더라. 나는 키 작은 남자는 도저히 안되겠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남자가 키가 작은 것은 나쁜(악) 것이구나.
고등학교 때 버스정류장에서 만났던 초등 동창생이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너를 우러러봤지만 지금은 내려다본다. 나 182다.'라며 엄청 뿌듯해할 때 진심으로 'So what?' 했었는데, 그 애가 왜 그렇게 자신의 키를 자랑(선)스러워했는지 나중에야 알았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의 외모를 평가할 때 얼굴 말고도 중요한 것에 큰 키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스무 살 때 친구 때문에 처음 알게 된 후에야 182센티 고딩의 으스댐의 이유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반면 나는 똑똑한 남자를 좋아했다. 단순히 공부를 잘해야한다기보다 지적이고 명철하며 날카로운 판단력을 가진, 자만해서가 아니라 열등감이 없어서 나오는 자신감 있는 남자가 좋았다. 나에게는 그런 것이 선이었다. 내 기준에 아름다워(선) 보이는 사람을 마침내 찾아냈으니, 그가 지금의 내 남편이다. ㅎㅎㅎ
그 남자랑 낳은 아들, 우리 둘째 조슈아는 그래서 키가 작다.
'미안해 아들. 엄마가 남자 키를 안 봤다. 내가 자식을 낳고 보니 이 사회에서 그것도 중요치 않은 게 아니었네. 엄마가 다음부터는 남자를 고를 때 꼭 키도 고려하도록 할게'
ㅠㅠ
그러나 아들의 작은 키가 한 번도 내 집에서는 문제시된 적이 없었다. 키는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료보험공단에서 성장호르몬 주사를 지원해 줄 퍼센티지 같으니 병원에 한 번 가보라는 전문가의 조언을 들었을 때 '호르몬을 조작하는 건 좀 위험한 것 같아요. 괜찮아요' 하고 쿨하게 말한 게 그 아들이었다. 아빠를 닮아 네가 자존감이 높구나. 다행이다.
몸을 과격하게 부딪치고 전략적으로 파울도 마구 하는 축구나 농구같은 공격적인 운동을 조슈아는 좋아하지 않았다. 잘하지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애초에 그 아이 성정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그게 문제(악) 되지 않았다. 남자답지(선) 못함으로 치부되지도 않았다. 탁구나 배드민턴, 골프 같은 운동을 하면 되니까. 싫은 것을 억지로 해야할 만큼 절대적인 것은 아니니까.
여고에서 고1 담임을 했을 때의 일이다. 엄마가 중학교 선생님이라는 한 아이가 우리 반에 배정되었는데 자신감과 용기가 없어 친구를 쉽게 못 사귀는 아이였다. 앞지기 선생님의 친구분이어서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주의 깊게 보았지만 '딱 우리 조슈아 같은 과네'하는 생각이 들었고, 맘에 맞는 친구를 만날 날이 있겠지 속으로 응원해 주었다.
2학기 시작하고 어머님과 전화상담을 하게 된 기회가 있었는데 어머님 말씀이 '동생은 지극히 정상인데 큰 아이만 대인관계에 있어 어려움을 겪어 걱정이다'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랐다. 성격이 너무나 극과 극인 두 아이를 키우는 그 어머니께 한 아이는 정상(선), 다른 한 아이는 비정상(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집 세 아이 이야기를 해드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저희 집에는 매우 다른 세 아이가 있어요. 첫째는 좀 개인적이랄까 사실 자기 공부 욕심에 친구를 굳이 막 사귀려고 노력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기적인 아이는 아니고 도리어 오지랖이 좀 넓은 편이어서 친구들을 잘 도와주어 다행히 친구들이 붙더라구요. 시험이 끝나면 얘는 피곤해서 집에 그냥 오려고 하는데 친구들이 못 가게 잡아서 떡볶이 먹고 적당히 놀다가 이쯤이면 됐다 싶을 때 집으로 도망 오는 식이죠.
둘째는 통 말이 없어요. 친구들이 학기 초에 관심을 가지며 다가와 두세 문장을 건네면 '응, 아니'로 대답을 하니 금방 친구들은 떠나죠. 그래도 시간이 좀 걸려 그렇지 두세 달 지나면 아이가 착한 건 느껴지니까 애들이 노는데 끼워주기도 하고, 학년 말쯤 가서 운이 좋으면 자기랑 맞는 친구가 생기기도 하더라고요.
막내는 인싸예요. 눈치도 빨라 친구들 비위도 잘 맞추고, 코로나로 학교 못 갈 때도 친구들 불러내 놀러도 가고, 진짜 심할 때는 줌으로 만나 자기들이 고안해 낸 언텍트 게임을 하는 것도 봤다니까요.
그냥 그래요. 누구는 정상, 누구는 비정상이 아니고요 다양한 아이들의 다양한 특성상 펼쳐진 스펙트럼 어딘가에 있는 그냥 그런Such 아이들이에요. 어머님은 아이를 둘만 키우시고 아마도 둘째가 어머니 닮아 원만한 성격이라 첫째도 둘째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첫째도 문제가 있는 아이는 아니에요.
저는 아이들을 서른 명을 함께 보잖아요. 고등학교 교실에 한 두 명은 꼭 있는 스타일이고, 사실 스스로가 외로워하거나 힘들어하지만 않는다면 그게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애들이 학기 초에 친구 빨리 사귀려는 이유 중에 같이 밥 먹을 사람 없을까 봐도 큰 이유가 되는데 어차피 코로나로 지정좌석제이기 때문에 그것도 지금은 문제가 되지 않고요.
가뜩이나 이 아이는 공부도 잘하던 아이라 고등학교 들어와 학업 때문에 긴장도가 높던데, 대인관계까지 문제가 있다고 어머니께 계속 지적받으면 아이 입장에서는 너무 힘들 것 같아요. 300명이 넘는 아이들 중에 이 아이랑 맞는 친구가 없겠어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아낼 거고, 관계 맺는 게 힘들더라도 그럴 가치가 있다고 느끼면 이 아이가 노력해 방법을 찾겠죠. 그러면서 성장할 테고요.
아이의 특성을 두고 조급하게 좋고 나쁨을 판단하면 어머님도 아이도 힘들 거예요. 자연스럽게 기다려 보시면 어떨까요? "
뭐 이런 식으로 말씀드린 것 같다. 그 어머님은 그날 오랜 시간 고민이었던 딸의 미숙한 대인관계능력에 대한 근심에서 구원을 얻으신 듯 느껴졌다. 너무 고맙다고, 이런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선생님 말씀이 맞는 것 같다며 고맙다는 말씀을 몇번이나 반복하시고 나서야 전화를 끊으셨다.
사실 내 중학교 때 별명이 똘똘이 스머프였다.
친구들의 짧은 교복 치마가 왜 학생신분에 어긋나고 본인을 보호하는데 취약한지, 습관적으로 쓰는 욕설이 어떻게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지, 왜 안경을 맞출 때는 안경점에서 검안하면 안 되고 안과에 가서 해야 하는지까지, 참으로 아는 것도 많고 선악의 구분도 명확하여 늘 친구들을 가르치는 아이였다. 그때는 그게 똑똑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남들보다 선악과를 두 배로 먹은 결과일 뿐이었다.
아직도 선악과의 독이 모두 해독된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을 훈육할 때는 문득 한 번씩 멈춰서 묻게 된다. 혹시 나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을 나쁜 것, 틀린 것이라고 탓하고 죄악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그런 나의 태도야말로 도리어 악이고, 아무 잘못 없는 아이들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