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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 부모의 기도

수능을 120여일 앞두고, 아들아 엄마는 네가 너무나 자랑스럽다.

by 이영란

둘째 조슈아의 열 번째 마지막 정기고사가 지난 주로 마무리되었다. 그레이스와는 너무나 다른 성격의 아이여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연출했던 장면들과 분위기도 무척 상이했다. 입시가 다 끝나고나서 그 아이의 성장기를 회고하면, 좋은 결과로 인해 과정이 과하게 미화되거나 나쁜 결과로 인해 의미있었던 과정조차 가볍게 폄하되는 식의 왜곡이 생길까 우려되는 마음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 마음 있지 않은가. 경기의 마지막 10분을 앞두고 작전타임을 외쳐 선수들을 불러모으는 코치의 심정 같은. '오늘 남은 경기의 결과가 어떻든 우린 이미 충분히 의미있는 경기를 뛰었고 너희는 이미 승자들이며 나는 너희들이 그 누구보다 자랑스럽다.' 그런 얘기는 경기가 끝난 후가 아니라 종료 10분 전, 지금에만 할 수 있는 얘기니까.


첫째라서 가장 주목하고 공을 들였던 그레이스에 비해 조슈아는 항상 뒷전이었다. 일단 그레이스한테 실험해보고 조슈아에게 대입해봐야지 생각했으나 예상과 달리 두 아이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그 작전은 생각처럼 실행되지 못했다. 셋째는 더 그랬다. 아마도 육아에 있어 노하우란 존재할 수 없는 것 같다. 아이를 열 명 정도 키운 분께 여쭤봐도 비슷한 답변이 나오지 않을까. 일단 그레이스를 다 키워보고 그 다음에 조슈아에게 집중할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 두 살 터울은 너무 짧았다. 그래서 늘 조슈아는 그레이스에 비해 60% 정도의 관심과 30% 정도의 간섭을 받았는데, 그게 도리어 조슈아에게는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주장과 표현이 강하지 않았던 반면 그레이스보다 더 주체적이고 주관이 뚜렷한 아이였다는 것을 근래에야 비로소 발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레이스가 대학을 잘 갔다는 얘기를 들은 많은 분들이 하신 말씀이 '그레이스는 아기때부터 남달랐어요'였다. 눈빛부터 남달랐다고 한다. 영어로 말하면 Extra ordinary? 마침 10년 넘게 휴직하며 집에 있었던 나는 그레이스를 읽어내고, 여러 교육법을 대입하고, 함께 좌충우돌할 수 있는 에너지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남다른 아이는 그 모든 것에 남달리 반응해 주었다. 그래서 내겐 그 시간들과 경험에 대해 얘기할 것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모든 얘깃거리는 '그레이스여서 가능한' 것들이었고 절대 다른 아이들에게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조슈아를 통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레이스가 초등학교 2학년때 '엄마, 우리 반에서 제가 계산이 제일 느려요'라고 말하여 두 아이의 방문 연산지 구독이 시작되었다. 그레이스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초시계를 앞에 두고 풀었고, 조슈아는 시계가 없어도 시간의 압박을 느끼며 그 상황자체를 견디지 못했다. 방문교사의 권유로 한자학습지를 함께 시작하였고, 학습동기를 만들어주는게 좋다며 두 달 후 있을 9급 한자검정시험을 신청했다. 시험을 앞두고 그레이스는 더 열심을 낸 반면 조슈아는 시험이라는 말을 듣던 그날부터 한자 공부를 중단했다. 각각 12개월과 15개월에 걸음마를 뗐다든지, 그레이스는 다섯 살에 한글을 뗐는데 조슈아는 초등 입학 2개월전에 겨우 책을 읽었다는 식의 우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두 아이는 그렇게 달랐다.


그레이스를 데리고 체계적으로 영어 읽기와 듣기를 훈련하는 동안 다섯살 조슈아는 뒷방에서 레고닌자고 애니메이션을 혼자 영어로 보며 귀가 트였다. 내가 복직하고 정신없어 2~3년 방치하는 동안 아무 것도 안 하다가 '하루 20분만 오디오 틀고 영어책읽기를 하자'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는 중학교 3년을 묵묵히 해 낸 아이이다. 학원에서 보는 단어시험은 끝까지 힘들어했고, 지금도 영어단어를 한국어로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지만 영어 모의고사가 100점이 나오는 이상한 이 아이는 '그냥 다른거지 모자라는 것은 아니라'는 증명을 스스로 매일 해보이고 있다.


중학교 2학년 첫 중간고사 첫날 영어시험을 보고 와서는 몇 점인지 모른다고 해서 '왜, 선생님이 답을 안 알려주셨어? 채점 안 해봤어?'라고 하니 본인이 몇번에 답했는지 모르겠어서 정확히 성적을 모르겠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해 재차 물어보니, '시험지에 답을 다 표기하고 나중에 OMR 카드에 옮겨 적으라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 그렇게 하는건지 몰랐다. 시험지의 문제를 보고 답을 정한 후 곧장 카드에 마킹을 했고, 그래서 시험지에는 답이 체크되어있지 않다'는 답변을 듣고 나서야 이 아이의 또 다른 측면에서의 Extra ordinary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때마다 '이 멍청아!'라며 나무라기에는 엄마인 내게 이 아이의 비범(非凡)함이 너무 재미있었고 솔직히 궁금했다. 이런 아이는 어떻게 자랄까?


물론 '시각적 정보를 처리하여 반응하는 속도의 비정상적인 느림'으로 인해 ADHD약을 먹어야했던 스토리도 있었으나, 그 과정을 거치며 아이는 '나의 느림은 장애가 아니라 성격이며 이는 단점이며 동시에 장점이 될 수 있는 나만의 특성'이라는 고백을 했다. 조급해하지 않고 묵묵히 열심히 노력하여 4등급에서 시작했으나 결국 2등급으로 끝난 아름다운 상승곡선의 수학성적을 기록하며 고등 내신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성적이 다 보여주지 못한 자신의 수학적 성장을 강조하며 수학교사인 엄마에게 일침을 날렸다. '우리나라 수학시험은 개념에 대한 이해만을 묻지 않으며 단기기억력, 순발력, 빠른 계산력, 눈치, 그리고 운까지 요구하는 불합리한 시험이라서 내가 가진 수학실력을 깎아내린다'고.


조슈아의 목표는 극지연구소 연구원이 되어 해양생물 연구를 하고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을 돕는 것이 목표인 사람은 학교가 어디든 의대만 가면 된다. 혹은 의대를 못 갈 성적이면 간호사나 약사나 물리치료사가 되면 된다. 목적이 명확하면 목표는 유연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기원을 밝히고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한 공부를 할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지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같은 세상의 서열은 적어도 조슈아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얼마전 컨벤시아에서 수시박람회가 열리던 날, 기대보다 좋은 성적이 나와주어 남보기에 좋은 대학에 도전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에 흥분하여 박람회장으로 떠난 엄마에게 아이가 근심스러운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생각해 봤는데 극지연구소 갈거면 무조건 대학 높이는 것보다 인하대가 훨씬 유리할 것 같긴해요...

채용도 해양학 관련이 많지 생물학 부문은 거의 안뽑고,

극지연구나 해양탐사 관련 이력이 있어야 채용에 유리하고, 동문도 인하대가 훨씬 많을거라.....

인하대나 서울대 아니면 딱히 극지연구소 취직에 도움 받을 수 있는 선배나 교수님이 없을거여서......

뭔가 다른 대학 갔다가 극지연구소 못가고 후회할 바에는

남들한테 과소평가 받더라도 극지연구소에 확실히 갈 수 있는 대학을 선택하는게 맞을 것 같아요....

높은 대학은 회사 취업할 때나 유리하지 극지연구소는 블라인드라 별 이점이 없을 것 같은......

극지연구소에서 연구원을 안뽑으면 극지연구소가 해양과학기술원 부설이라

해양과학기술원이라도 가야 하는데 거기는 그냥 해양학 관련 전공만 뽑아요...


ㅋㅋㅋ

다 붙은것도 아닌데 뭐 벌써 고민을 해.

엄마가 분주하게 움직이니까 네가 심란하구나?

너 교수 할 수도 있고

어차피 유학까지 갔다오면 학부는 별 상관 없어.

그리고 네 꿈은 극지연구소에서 시작했지만 공부하다보면 어떤 길로 네가 이끌려갈지 아무도 몰라.

일단 나를 어느 한 수준에 한정짓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최선을 다해서 나아가는게 중요하더라고,

엄마가 살아보니.

그래서 지금 엄마는 엄마대로 최선을 다하는거야.

길은 만들어져있는게 아니야.

네가 걸어가면 길이 생기는거지.

그러면 후배들이 '아 저렇게도 갈 수 있는거구나' 깨닫게 되겠지만

그 누구도 너랑 같은 길을 쫓아간다고 같은 결과를 얻게 되지도 않아.


뭔가 나중에 여러 학교 붙으면 소신껏 선택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불안해지는 것 같아요.....

그냥 주위의 의견에 떠밀려서 살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될 것 같아서.....


걱정마세요. 엄마가 네가 원하지 않는 인생을 살도록 간섭하지는 않을거니까.

네 인생은 결국 네가 결정해서 가야지.

그리고 여러 학교 붙을 것 같지도 않으니 ㅋ

이제 걱정말고 맘 편히 공부하세요.



조슈아는 이렇게 점잖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을 줄도 아는 아이이다.

그리고 며칠 후 쐐기를 박는 문자를 또 한번 보내왔다.


창체 시간에 생기부 채우는 활동하면서 아인슈타인에 대해 조사해 봤는데 저랑 생각하는 게 비슷하네요 ㅋㅋㅋㅋ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That everyone is thinking alike means that no one is thinking.)"

"삶의 일상에서 예정되어 있던 순서가 방해받았을 때,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어디서 왔는지도 잊어버리고,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초라한 널빤지에 올라탄 조난자들처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걸 완전히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보다 쉬워지고 더 이상 실망할 게 없다."

"개인을 불구로 만드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최대 악이다.

이 악 때문에 우리의 교육체계 전반이 고통을 겪고 있다.

과장된 경쟁을 벌이는 태도가 학생들에게 주입됐고,

그래서 학생들은 미래 직업을 위한 성공을 숭배하게 됐다."


고3이면서 반 년만에 단테의 신곡 세 권(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을 화장실에서 (똥싸며) 모두 독파하고, 영어원서로 데미안을 끝내고 모비딕을 읽고 있는 우리 멋진 아들은 담임선생님 및 두 세 친구들과 함께 옥상에서 해바라기, 토마토, 레몬을 키운다. 철저히 목표지향적인 대문자 T 그레이스와, 복도에 갖힌 새 한마리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는 교실에 들어갈 수 없는 낭만파 F 조슈아가 한 배에서 나온 것이, 그 배 주인인 나로서도 참 믿기 어렵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엄마는 '이것을 주세요'라고 요구하는 기도를 할 수 없다. 20년간 그 아이들 곁을 지키며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 아이들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이 아이들에게 생명의 씨앗을 심으신 분이며, 그 씨앗에서 어떤 꽃이 필지는 내가 알 수도 없고 내 책임도 아니며 그 열매 또한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기도한다. 이 아이들의 경이로운 성장의 과정에 내가 함께하며 혹여나 상처를 입히거나 짓밟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를, 그리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그렇게 아이를 키우는 일은 한 인간을 한없이 겸손하게 만드는 부담스럽고 동시에 벅찬 사명임에 분명하다.





이 마음을 잊지 않으며, 저 끝방에서 지금도 폰만 보고 있는 아직 어리고 어리석은 우리 막내 올리비아를 참아낼 수 있는 마음을 주십사 하는 기도도 잊지 않고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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