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을 해방하다
남편은 과학자이다. 이성적이고 공감력이 부족하다. 극단적인 대문자 T형이라고 해야하나.
결혼하고 거의 10년 쯤 되었을 때, 이 남자랑 더이상 살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세 아이의 육아, 세월호 사건 등을 겪으며 나를 공감해주지 못하는 이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뭐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사사건건 부딪칠때마다 정나미가 떨어져서 내가 더는 이 남자를 사랑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남편의 태도에 화가 났는지 지금 다시 분석해보면, 그때 나는 감정보다 이성이 우월하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사건에 대해 이성적으로 반응하는 남편 앞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그즈음 우리는 부부상담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기질 검사를 했고, 달라도 너무나 다른 서로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달라서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법을 배워 지금은 잘 살고 있다.)
이후 대한민국에 MBTI검사가 대유행을 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설명해주는 특정 유형을 묘사하는 것에 지나치게 기뻐했다. 생각해보면 MBTI는 설문지에 본인이 나는 이런사람이야라고 답한 내용을 바탕으로 16개의 유형 중 어딘가에 대응시킨 후 그 속한 그룹의 공통특징을 다시 짚어주는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자신을 설명해놓고는 다시 상대가 그 특징을 반복해서 말해주는게 뭐 그리 신기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그 테스트지가 자신을 이해해준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내 기억에 MBTI 이전의 사회는 좋은 성격과 나쁜 성격, 원만한 성격과 모난 성격, 심지어 정상과 비정상으로 사람들의 성격과 성품을 쉽게 양분하고는 일방적으로 한편의 무리에게 성격을 바꾸라고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평소 '21세기가 요구하는 인재상' 같은 것을 보며, 왜 특정인에게만 있는 특징인 '공감하는', '리더십' 같은 성품을 교육을 통해 키워나가야하는 것인지, 생긴 모습 그대로는 21세기에 쓸모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인지 반감이 들었었다. 21세기에 대접받는 성품을 지닌 아이를 아무리 낳고 싶어도 그건 엄마맘대로 안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내 바램과 상관없이 태어나고, 태어난 대로 자란다. 그건 거의 업보처럼 random하며, 태교를 포함한 교육으로 바꾸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MBTI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서로를 생긴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물론 '나쁜 B형 남자'처럼 'T송합니다' 같은 말이 있기는 하지만, 예전같이 너의 나쁜 기질을 좋은 성품으로 바꾸라는 식의 폭력으로부터 우리는 다소 해방될 수 있었다.
다양한 연속적 스펙트럼의 어딘가에 위치한 복잡하고 심오하기 그지없는 한 인간을 16가지 유형 중 어딘가에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도 다소 무리는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MBTI 덕에 서로를 빠른 시간 안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무리한 기대를 하지 않아 실망도 상처도 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T만 빼고) 자신의 어떠함 때문에 더이상 열등감을 느끼거나 미안해하지 않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잣대가 특정인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품게 되는 극히 드문 결과를 가져온 것이 신기하다.
고3인데 매일 10시면 집에 들어오고(맘 내키면 더 일찍도 들어오고), 똥싸러 들어가며 단테의 <신곡>을 가지고 들어가며, 극지연구소에서 보내주는 '북극연구소탐방' 프로그램에 (고1도 고2도 아닌 고3 수험생이, 누나말대로 그 시간에 수능 공부를 더 해서 대학에 들어가야 극지연구소에 취직도 하는거지, 혹시라도 뽑혀 열흘이나 북극에 가게 된다고 극지연구소 취직이 더 쉬워지는 것도 아닌데) 남몰래 응모하는 낭만파 아들의 수험생 엄마노릇이 첫째 때와 달리 평온하기 그지없어 어안이 벙벙하다. 우리가 낳은 자식이 맞는지 참 신기한 INFP 아들을 보며 좋다 나쁘다 섣불리 판단하거나 뜯어고치려 하지 않고 그냥 웃으며 인정해주는 내가 참 장하다. MBTI 문화의 영향인지, 간혹 아이가 이해가 안 되어 어이가 없을 때면 한발 물러나 인프피INFP는 원래 그렇다더라며 아이를 관망하고, 저런 애는 어떻게 자랄까 마냥 궁금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저희 아들은 좀 도인같아요'라고 하니 '부럽다. 나는 아들 덕에 도를 닦는데..' 하시는 또다른 수험생 엄마 샘에게 '저 부러워마세요. 샘은 그 아들 하나죠, 저는 샘 아들 같은 딸이 둘이나 더 있어요'라며 웃었다. 기대와 실망이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기에 그 또한 우리 부모의 몫이지 싶다.
어찌 되었든, 서로에 대해 궁금해지게 만드는 MBTI 문화가 사람들을 덜 외롭게 만들어주면 좋겠다.
<부록>
조슈아와의 대화
이 톡 내용을 보여주자 그레이스가 묻는다.
"어떻게 키우면 애가 저렇게 돼요?"
"난 셋 다 똑같이 키웠어. 근데 넌 사악하잖아."
"글쿠나. 그냥 쟤는 실수로 저렇게 태어난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