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천국은 없다.

내가 사는 이곳이 천국

by 이영란

휴스턴에서 다니던 교회에 송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송장로님은 70년대말 국비유학생으로 독일에서 공부하다 파독 간호사인 부인을 만나 결혼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사는 분이었다. 공학을 전공해 젊을 때는 미국 기업에서 근무하기도 했지만 교회에 오시며 미용재료상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고, 아내 자매님은 미국에서도 간호사로 계속 일하고 계셨다. 미국에서 태어난 두 아들은 한국사람들도 다 아는 아이비리그 대학과 메디컬스쿨을 다니고 있었고,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아이들은 부모님께 영어를 하며 대화하는 뭐 지극히 평범한 교포가정이었다. 사랑으로 우리 가정을 지지해주시던 좋은 분들이어서 지금까지도 감사한 마음이 많지만 그 장로님께 보이는 뭔지 모를 부정적인 분위기는 만날 때마다 마음을 무겁게 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독립된 한인교회가 아닌, 미국 교회 안에 있는 한인 커뮤니티에 참석했다. 모두 미국교회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영어보다는 한국어로 예배 드리기 원하는 부모님 세대가 계셔서 아침 9시에 교회에서 내어준 작은 방에서 한국어로 먼저 예배를 했다. 한국어 예배가 끝나면 영어 예배에 참석하기 원하는 학생, 청년들은 본당으로 가고 남은 어른들은 그 방에서 교제를 하다가 모두 끝이 나면 한인들끼리 함께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가는 시스템이었다. 모두 합하면 다섯 가정 정도 되었던 규모였다.

나는 그때 아직 이십 대였고, 젊은 아이들과 영어예배로 건너가는 것이 나이를 생각하면 더 적합해 보였으나 영어실력이나 정서는 부모님 세대와 더 맞았기 때문에 왠지 남아서 그 분들과 대화하며 고단했던 일주일을 위로받고 싶었다. 그 분들도 미국 사람들과 일하시고 미국 아이들을 키우시는 입장에서 한국에서 금방 온 우리 부부와 함께 시간 보내는걸 좋아하셨다.

금방 내린 커피와 막 튀긴 글레이즈드 도넛을 서너개씩 먹는 즐거운 교제 시간이 처음 몇 달은 너무너무 좋았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교제의 시간을 뒤덮는 검은 그림자가 느껴지기 시작하고 마음이 편치 않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송장로님이 계셨다. 피로하고 부정적인 표정의 송장로님은 서로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대화가 끝나면 그 주에 당신이 보신 한국 뉴스 얘기를 꺼내셨다. 한국 정치의 혼란과 안타깝고 절망적인 사회뉴스를 전하며 한국은 그래서 가망이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시곤 했다. 송장로님이 주로 보시는 TV프로그램은 뉴스를 비롯해서 <그것이 알고싶다>나 <시사매거진 2580> 같은 시사프로그램이었다. 미국 시민으로 미국에서 30년을 살면서 미국뉴스보다 한국뉴스를 더 심도있게 보시는 이유가 궁금할 정도였다. 한국에 대한 태도가 그리움이나 애정이 아니어 보였기 때문에 그 관심은 뭔가 다른 의도에서 나왔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일 년 정도 지난 어느 명절에, 그 당시 메디컬스쿨을 다니고 있다가 명절을 보내러 온 송장로님의 큰 아들과 대화를 하며 나는 송장로님에 대해 조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한글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한국말도 잘하는 다른 집 아이들과는 달리 송장로님의 아이들은 부모에게 절대 한국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자친구도 노랑머리, 파란 눈의 미국아이를 사귀고 'looks like 똥, smells like 똥'하며 된장도 먹지 않던 본인이 대학에 가서 자신이 한국인임을 깨닫고 한인교회에 나가 한국말을 배우고 친구들과 한국음식과 한국문화를 즐기게 되며 한국인이 된 얘기를 해주었다. 왜 그렇게 한국인인걸 부정하고 싶었냐고 하자, 한국이 자랑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지금처럼 K컬처가 우세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많은 아이들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집 아이들은 유독 한국인인것이 싫었는데 그게 다 아버지가 끊임없이 얘기해준 나쁜 나라 한국에 대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물론 송장로님은 70년대 지식인으로 군부독재사회의 불합리와 부조리가 유독 더 힘드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유롭고 풍요로운 미국에서 잘 산다고 해도 타향살이가 마냥 좋은 사람은 없다. 이미 이곳에서 미국 사람으로 미국 아이들을 낳아 뿌리내리고 사는 입장에서 이제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타향살이였을텐데, 그 고단함을 이겨내고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여 오늘을 버티기 위해서는 돌아갈 수 없는 고국을 가망 없는 나라라고 신포도처럼 저주하는 것이 송장로님에게는 유일한 선택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도때도 없이 쏟아내는 부정적인 말들로 인해 한번도 가 본 적 없는 한국이란 나쁜 나라의 혈통을 가진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해야만 했던 그집 아이들을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아팠다.


한국으로 돌아와 내 아이들을 한국 사람으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하고 귀국하는 결정을 하기까지 많은 경험들과 더 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사실 나도 한국인으로 태어날 것을 선택하지 않았고, 한국에서 살아야지 결정한 적 없이 25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그러나 참 감사하게도 미국에서 6년을 살아본 후 두 나라의 삶을 비교하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행운을 가졌다. 나는 내가 더 행복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나라여서 한국을 택했다. 돌배기, 세 살배기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행복해야 니들도 행복한거야'하며 함께 끌고 온 한국이기는 하지만, 생김새가 비슷한 모국어의 나라에서 자라나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한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느 곳에서든 삶은 고단하다. 선택한 그 길에서 만나는 고단한 결과는 이를 악물고 감내해야한다. 인생은 이휘재의 <인생극장>처럼 두 옵션을 다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의 선택을 정당화하고 스스로 잘한 선택이라고 끊임없이 확인하기 위해 선택하지 않은 길에 침을 뱉는 것도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니라는 것을 송장로님께 배웠다. 그분께 그것이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면 그분의 얼굴이 그토록 짜증과 피로로 점철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송장로님처럼 내 삶이 고단하고 내 결정에 회의가 들때 그저 나는 이렇게 되뇐다. 세상에 천국은 없다. 그리고 살짝 고백하자면, 내 유튜브 추천동영상에는 늘 국뽕 영상들이 넘쳐난다.

그래도 나는 미국에 사는 분들께는 미국이 천국이에요라고 말씀드리고, 한국에 사는 분들께는 한국이 최고야라고 말하는 센스는 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이율배반적인 사람임도 솔직히 인정한다. 나는 휴스턴에 살때는 휴스턴이 최고, 완주에 살때는 완주가 최고였다. 그리고 지금은 송도가 최고이다. 어떤가. 나는 항상 최고로 행복한 사람인데. 결론은, 어디서든 나는 항상 Winner라는 사실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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