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ILE

손 내밈의 릴레이

by 이영란

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도 부산에는 떠나지 않은 혹은 떠나지 못한 피란민이나 실향민들이 많았다. 육 남매 중 넷째였던 나의 엄마도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간 외조부모님이 1953년에 부산에서 낳은 아이였다. 전쟁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한 할아버지는 20년이 지나도록 상경하지 못하셨고, 엄마는 부산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시집 간 언니를 쫓아 서울로 올라가 직장생활을 시작하셨다. 나중에는 부산 아가씨와 결혼한 삼촌 한 분만 남고 모두 서울로 돌아갔고, 그래서 엄마의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부산에 가 본적이 없었고 부산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 부산은 단순한 피란지가 아니라 임시 수도였다. 서울대 연희대 고려대 등의 캠퍼스가 부산과 경남 등지에 열렸고 실제로 수업과 연구, 졸업까지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부산은 거대한 야전 병원이기도 했다. 일신 기독병원, 복음병원, 메리놀 병원 등에서는 미국에서 건너온 의료선교사들에 의해 전쟁 구호활동이 이루어졌고 그 병원들은 지금까지도 운영되고 있다.


나는 이런 얘기를 미국의 한 영어교실에서 처음으로 들었다. 라이스 대학의 ESL 클래스를 두 학기 마친 후에는 저렴한 커뮤니티칼리지의 수업과 인근 대형 교회에서 여는 무료 영어교실을 이용하여 살아있는 영어를 배우기로 했고, 그 중 휴스턴에 사는 한국 여자들이라면 한번씩은 다 거쳐간다는 SMILE에서 놀랍게도 그런 부산과의 인연을 듣게 되었다.


SMILE은 South Main International Learning Experience의 약자로, South Main Baptist Church에서 외국 여성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한번 여는 ESL 및 문화 적응 교육 프로그램이다. 휴스턴의 몇몇 대형 교회들이 주중에 하루씩 여는 무료 ESL클래스는 이곳 말고도 몇 군데 더 있었는데, 이 중 유독 SMILE이 한국 유학생 와이프들에게 인기가 높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스마일에서는 오전에 세 시간 정도 이루어지는 수업시간동안 아이들을 봐주는 Child care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이 교회는 이전에 학교를 운영한 적이 있을 정도로 부흥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연령별로 나누어 돌볼 수 있는 교실이 있었고, 교회는 자원봉사자를 활용하여 그곳에서 아이들을 봐주었다. 아무리 무료 학교여도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으면 공부하러 올 수 없는 젊은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스마일은 다른 교회의 무료 영어학교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로 외국인을 대했다. 대부분의 교회들에 가보면 '하나님께 더 많이 받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마인드로 사역을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게 뭐가 문제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런 태도를 가진 미국인을 겪어보면 그들 속에 '경제적 우열이 하나님의 축복의 차이, 심지어는 인간 존엄성의 격차'라는 믿음이 있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사실 우리의 무의식 속에도 있을지 모르는 그런 생각을 외국인의 입장에서 경험하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반면 스마일은 영어 잘하는 미국인이 영어 못하는 외국인에게 언어교육을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그들이 스마일 사역의 목표로 표방하는 것은 다ㅡ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회 시스템에 대해 알지 못해 곤란을 겪을 외국인 여성들의 친구가 되어 미국에 잘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를 설명하자면 그 당시 30년 가까운 시간동안 이어져 온 스마일 서비스를 처음 시작한 Dr. B와 Mrs. B의 이야기를 해야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젊은 산부인과 의사였던 Dr. B는 아내와 어린 아기를 데리고 부산으로 의료선교를 가게 되었다. Dr. B는 연희 어학당에서 한국어도 배우고 복음병원에서 진료도 하며 큰 활약을 했지만 그의 아내인 Mrs. B는 어린 아기를 돌보느라 한국어를 배울 수도,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다. 집에 갇혀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Mrs. B의 유일한 친구는 집에 일하러 와주는 한 한국 아주머니 뿐이었다. 그 아주머니는 어린 아기와 함께 이국 땅의 작은 집 안에 갇혀버린 미국인 색시에게 단순한 도우미 일꾼이 아니었다. 유일한 친구이자 한국어 선생님이었던 그 아주머니 덕에 Mrs. B는 한국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고 했다. 미국에 돌아온 Dr. B 부부는 퇴직 후, 다니고 있던 South Main Baptist Church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휴스턴에 온 외국 여성들에게 거꾸로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다.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셨겠지만 내가 스마일에 다니던 2003~2006년에도 노부부는 그 사역에 Spirit을 부어주며 수장 역할을 담당하고 계셨다.

그런 스마일은 운영 방식도 독특했다.

첫 한 시간 반동안 영어를 배울 때는 선생 한 명에 학생 둘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1대1 혹은 1대2로 매칭해서 반을 만들었다. 서로의 성장과정, 지금 처한 상황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이해하는, 정말 친구가 되는 시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혔다. 자원봉사 선생님이 또래이기도 하고 언니뻘이기도 하고, 이모나 할머니 나이일 수도 있다. 아, 물론 할아버지도 있다. 그러면 그런대로 관계가 맺어지고 그 관계에서 서로 나눌 수 있는 우정을 쌓는다.

나머지 한 시간 반 동안은 선택 동아리 활동을 한다. 아울렛이나 식료품점 등 미국에서 쇼핑잘하는 법 배우기, 아이들 학교 등록 시스템이나 학교 문화에 대한 시기별 안내, 임신과 출산에 관련한 영어표현과 병원 이용법 배우기, 신문 읽고 미국 사회 이해하기, 퀼트나 가드닝 같은 미국 아줌마들의 취미 생활 쫓아해보기, 미국 식재료를 이용한 미국 가정요리 배우기, 인터네셔널 합창단 같은 클럽 활동으로 미국 친구들을 통해서가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스마일에서 경험했다.


나는 지금 송도에서 한 국제교회에 나가고 있다. 60개국이 넘는 나라의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송도에 거주하는 동안 머물다 떠나는 정거장 같은 교회에 10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교회를 처음 방문했을때 나는 잊고 있던 스마일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Mrs. B가 부산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을때 친구가 되어준 한국 아주머니처럼 내가 휴스턴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때 내게 스마일이 친구였고, Mrs. B가 자신의 나라로 다시 돌아가 스마일을 연 것처럼 나도 이제 내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같은 일을 해야할 차례구나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도 교회에서 만나는 영어권 친구들을 만나면 자신들이 경험한 미국의 교회를 떠올리고 거기서 받은 친절을 다시 되돌려주려고 애쓴다. 이처럼 이방인을 향한 손내밈의 릴레이는 내가 마음대로 멈출 수가 없는 것이었음을 느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처음 베풀어졌던 한 부산 아낙의 손내밈의 친절은 오늘도 이곳에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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