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로 초대받다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믿음

by 이영란

라이스 대학은 인근 대형교회의 도움을 받아 유학생들을 위해 호스트 패밀리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volunteer 희망가정과 싱글 유학생, 혹은 유학생 가정을 매칭시켜 미국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히고 정서적인 지원을 받게 하기 위한 제도였다. 땡스기빙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에 유학생들을 가정에 초대하여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여름휴가 가족여행에 유학생을 초대하는 호스트패밀리도 있었다. 전혀 다른 문화에서 온 유학생들이 자기들끼리만 모여 지내면 전혀 경험해 볼 수 없는 미국 가정과 문화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경험이었다.


우리의 호스트 패밀리는 어린 매를 키우는 젊은 부부였다. 특이점이 있다면 그 와이프 K가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라는 점? 그래서 더 기대됐다. 교포와 유학생이라는 다른 처지이지만 같은 한국인으로서 만나자마자 동포애가 느껴지지 않을까 기대했는지도. 하지만 직접 만나보니 얼굴만 동양인일 뿐 한국말도 못 했고 표정도 제스쳐도 그냥 미국인이었다. 애초에 자기가 우리와 같은 한국사람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는 듯 보였다. 조금 실망스러웠다.


우리가 K의 집을 방문한 날은 2002년 11월 땡스기빙 주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날 우리는 K부부가 직접 요리한 칠면조를 비롯한 땡스기빙 음식들을 먹으며,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미대륙에 도착해 굶어 죽을 뻔한 위기에 있던 유럽인들을 구해준 인디언들과, 그들의 도움으로 첫 수확을 하여 하나님과 인디언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한 초기 정착민들의 스토리를 들었다. 그들의 첫 수확물인 옥수수, 감자, 호박, 밀 같은 땡스기빙 상징 데코레이션을 함께 보며, 우리 모두는 서로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이유로 이 곳에 왔으나 서로의 생존을 돕는 친구여야한다는 K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단한 박애정신이나 동포애가 아니어도 그저 인지상정, 역지사지면 충분한 마음이었다.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민 K부부의 호의는 자신들이 머무는 땅에 뒤늦게 도착한 친구들을 향한 인디언들의 순수한 마음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와 몇 달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꽤 국제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ESL에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미국 교회에 나가며 여러 인종의 사람들과 교제했다. 짧은 영어이지만 단순한 인사를 넘어 제법 친구처럼 안부도 챙기고 농담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과연 국제적이라는 것이 여러 국적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의미일 뿐일까.


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가장 먼저 그의 인종을 의식하고 있었다. 마르코, 왕웨이, 라훌, 다까네, 스티브의 인격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태리, 중국, 인도, 일본, 미국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K는 한국국적의 누군가가 아닌 그저 나라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K는 인격과 인격의 만남에서 인종이나 국적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기에 그것을 묻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가 K에게서 받은 실망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내 국적에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도리어 충격적으로 다가온 점이라면 어떠한 국적의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그녀의 믿음이었다. 같은 한국인이어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기대는, 거꾸로 다른 민족과는 친구가 되기 어렵다는 생각과 맞닿아 있는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서로의 다른 점에 집중하고 낯설다고만 생각했으나 그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며 서서히 우리는 공통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피가 흘러서도, 비슷한 나이여서도 아니었다. 그저 솔직히 서로를 열어 자신의 모습을 조금만 보여주어도 느낄 수 있는 사람 다 거기서 거기, 사는 것도 다 거기서 거기, 뭐 그런 동질감 말이다. 잠깐의 낯섦만 극복하면 이 낯선 친구와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용기를 내어 잡아보고 싶었던 K의 손, 나는 그녀가 내민 손을 통해 정말 국제적인 것이 무엇인지, 진짜 친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살아보니 비단 국적이 달라야만 이방인이 아니었다. 지방색이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직장에서, 아이들 학부모 모임에서 만나곤 하는 타인들이 때때로 같은 한국말을 하지만 나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고 느낄만큼 낯설 때가 있다. 인종, 국적 뿐 아니라 성별, 종교, 직업, 나이 같이 사람을 포장하고 있는 조건들이 사람을 사귀는데 장벽처럼 느껴질 때 그 이유로 관계맺기를 포기해도 되는걸까? MZ니 꼰대니 하는 손쉬운 말로 딱지를 붙이고 그래서 친구가 될 수 없고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세상에 사람 많은데 굳이 나랑 안 맞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이 나이에 새로운 친구를 또 사귀어야 하느냐는 의문이 생길 때도 있다. 스물 일곱의 휴스턴 새댁에게 그것은 생존과 관계된 일이기는 했으나, 국제적인 사람이 되어 나의 지평을 넓히고 나 자신을 넓히는 일이 가치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그 믿음이 한국에 사는 나이 오 십의 내게는 이제 필요 없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내 존재와 내 인생에서 가치나 의미 같은 엑기스들이 줄줄이 빠져나가 쭈글쭈글해지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불필요해 보이는 그런 귀찮은 일을 다 걷어버리고 나면 인생에 뭐가 남나 싶은 것이 갑자기 서글퍼진다. 아마도 정답은 No인가보다.


직장에서는 내가 선택하지 않았으나 일 년 이상 매일 부딛쳐야하는 사람도 생기고, 작년처럼 대학입학 30주년이라는 어거지스러운 명분에 이끌려 내 발로 수 백명의 모르던 친구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러 새로운 자리에 나가는 일도 있다. 그 자리에 나갈지 말지, 그 사람에게 나를 더 오픈할지 말지 선택해야하는 상황들은 분명 수고로움을 요구한다. 친구를 얻으려면 수고가 따른다. 그런 수고가 이득이 될지 묻기보다 가치가 있는지 묻는다면 더 용기내기가 쉬워진다. 자신들과 다른 나를 두려워하거나 피하기보다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지고 다가와주면 좋을텐데 생각했던 휴스턴 새댁의 마음을 다시 떠올리면 나도 그런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가는 열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은 누군가를 소외가 아닌 포용으로 품을 수 있다는 뜻일테니, 그런 내가 되는 것은 분명 더 가치있는 일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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