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밖에 없다

이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by 이은설


복숭아 몇 개 보냈어요. 한동안 소식이 뜸했는데 문자가 왔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그저 무심한 말투로 적힌 문자 한 줄이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았다. 우리는 지금 떨어져 산다. 삶의 방향이 달라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의 계절을 따로 맞이하게 되었다. 남편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나는 서울에서 요양보호사 일을 하며 지낸다. 매년 복숭아 맛을 보지 못하고 지냈는데 올해 불쑥 복숭아를 보낸 것이다. 가공장 마당 한쪽에 혼자 서 있는 복숭아나무에서 딴 것이라고 했다. 연식도 오래되고, 토양도 변변치 않은 곳에 뿌리를 내린 나무다. 그 나무가 아직도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자그마한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뚜껑을 여니 복숭아가 열 개쯤 담겨 있었다. 그중 하나는 너무 익어 멍이 들어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복숭아를 조심스레 꺼내 씻어 먹어 보았다. 겉은 상했지만 속은 멀쩡했다. 그건 상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익은 것을 담았는데 오는 도중 부딪혀서 멍이 든 것 뿐이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안다. 눈으로만 보고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겉모습만 보고 버리는 일은 누군가의 수고를 가볍게 여기는 일이 된다. 자연이 허락한 결실을 무시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복숭아 하나에 깃든 시간과 손길을 알기에 함부로 버릴 수 없었다. 그 복숭아를 먹으며 나는 올해 유기농 복숭아를 처음 맛봤고, 복숭아의 여름을 만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유기농 복숭아를 먹는 일은 쉽지 않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마음이 담긴 복숭아 한 박스가 큰 선물로 느껴진다. 한여름에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선물 한 상자 받은 느낌이다.


한때 800평 남짓한 복숭아밭을 조성한 적있다. 처음엔 Y자형 팔매트를 설치하겠다고 둘이서 파이프를 세우고 나사를 조이며 밤이 깊도록 일했다. 해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손끝으로 작업했다. 작업을 마치고 나면 해드렌턴의 푸른 불빛으로 눈이 시리고 몸은 피곤했다. 고되고 힘들었지만 아이들과 살아갈 꿈을 키우는 일이고 농사의 기본이라고 여겼다. 농사는 성실함이고, 고된 노동이었다. 유기농을 고집했기에 병해충 방제는 더 어려웠다. 청도 복숭아 시험장의 박사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현장 지도를 받아도 소용없었다. 농약을 치지 않으니 나무가 하나둘 죽어갔다. 결국 복숭아 수확은 제대로 못했고, 구조물도 모두 철거했다. 팔매트 아래 묻힌 노력과 땀, 계절의 흔적들까지 모조리 접어야 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진 뒤에도 가공장 마당 한 편에 심어진 복숭아나무 한 그루는 남았다. 농약 친 복숭아는 먹지 않겠다며 그가 직접 심은 나무였다. 나는 그 나무를 거의 잊고 있었다. 서울로 온 뒤에는 한 번도 그 나무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그 나무 곁에 있었고, 적과를 하고, 봉지를 씌우며, 열매를 키우고 있었다.


나는 비 오는 날이면 창문 하나 닫으면 비 설거지가 끝이다. 시골의 농부는 비와 함께 뛰어다녔을 것이다. 장마가 시작되면 농부의 마음은 더욱 바빠진다. 과일 봉지를 씌워야 하고, 병충해 대비를 해야 하고, 일손은 늘 부족하다. 예전엔 봉지를 다 씌우고 나서야 잠마가 시작되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초보 농사꾼 시절에는 감자를 캐야 하는데 바구니가 없어 이웃에서 상자를 빌려오기도 했다. 해야 할 일은 많고, 일손은 없고, 날은 촉박했다. 그럴수록 자연은 더 예측할 수 없었다. 어떤 해는 7월 한 달 내내 비가 내려 홍화를 탈곡하지 못해 씨앗으로만 쓰기도 했다. 지금은 그 모든 시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멀게 느껴진다. 지금도 그렇게 여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득하다. 그때 그 많은 일을 어떻게 그렇게도 억척처럼 일을 했을까 생각 든다. 나를 챙기는 것은 고사하고 앞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오로지 농사일과 농장 일에 나의 시간과 노력, 열정 모든 것을 바쳤다.


복숭아가 도착하고 나서 바로 전화하지 못했다. 해가 있는 동안은 농장에서 일하는 데 방해가 죌 것 같았다. 마음이 담긴 귀한 복숭아를 받고 문자 한 통 달랑 보내는 것은 매정하다는 생각들었다. 수업을 마치고 10시경 전화했다. 자려던 참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복숭아는 올해 7kg 정도 수확했고, 그중 4kg은 팔고 나머지를 나에게 보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보내지 못했다고 한다. 순간 마음이 뭉그러졌다. 내가 뭘 했다고. 무슨 자격으로 이 귀한 것을 받았을까.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입안에서 맴돌기만 하던 그 말, 끝내 꺼내지 못했다. “당신밖에 없다.”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럼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쑥스럽고,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하고 낯설어서, 그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하듯, 해야 할 말은 미루지 않고 해야 한다. 고마운 사람에게 고맙다고, 소중한 사람에게 소중하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 빚진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마음은 오래도록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할 것이다. “당신밖에 없다.” 말하고 나면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하지 않고 가슴에 담아두면 무겁고 고단하다. 언젠가는 꼭 말하고 싶다. 그 말을 꺼낼 용기가 아직 없다, 말보다 앞서 글이라도 먼저 전하고 싶다. 나 스스로를 아끼고,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은 기본이고 나를 위해 애쓰고 마음 써 주는 이에게 “당신밖에 없다”이 한마디 할 수 있는 용기 있었으면 좋겠다. 말 한마디에 담긴 온도는 때로 계절을 바꾸기도 한다. 그가 보낸 복숭아 열 알이 내 여름을 바꾸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