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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승찬 Mar 10. 2021

나를 모른다는 것에 대한 얕고 옅은 고찰

저는 몇 년째 종종 인디 공연들을 찾아갑니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가수에 대한 동경이 많았던 저는, 심지어 한때 사이즈가 아주 작았지만 인디 공연 기획도 해봤을 정도로(지금 생각해보면 기획에 참여했다기보단 그냥 끄나풀에 가까웠지만) 그냥 음악을 듣고 들려주는 과정을 참 즐겁다고 느꼈습니다. 요즘에야 피곤하다는 핑계로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는 일도 드물어지고, 코로나로 인해 발길을 줄이긴 했지만- 여전히 가끔 새로운 사람들과 음악을 마주한다는 사실은 제겐 꽤나 즐거운 일입니다.

보통 제가 찾아가는 공연은 단독 콘서트와는 거리가 멀어서 4~5팀이 각자의 타임 테이블을 가지고 본인들의 곡을 선보이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관객의 대다수는 라인업 중 1~2팀 정도만 팬인 상황이 많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래서 응원하는 아티스트의 무대가 먼저 끝난다면 중간에 슬쩍 빠져나가거나, 늦은 타임의 무대라면 그 전에는 집중하지 않거나 고의로 늦게 도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생깁니다.

그럴 때마다 실연자들이 공연을 할 때 본인 차례에 객석이 비어있다는 것이 얼마나 섭섭한 일인지, 붉어진 얼굴로 맥주병을 들고는 살짝 풀린 혀로 토로했던 한 친구의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관객석 한 군데가 텅 비어있으면 진짜 내 마음도 텅 비어버린 기분이야.

그래서 저는 가능하면 제가 좋아하는 가수의 무대가 끝나더라도 보통 끝까지 시간을 채워 모든 가수의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그렇게 하루의 공연이 끝나면 보통 시간은 꽤나 늦은 밤. 혼자 발걸음을 옮기며 머릿속으로 조명에 에워싸 졌던 무대를 떠올리고 정리해봅니다. 즐거웠던 기억이 지나고 미소가 점차 옅어질 때 즈음, 거의 매번, 뗄 수 없는 찝찝함 또한 마주하곤 합니다.


'오늘도 조금, 불친절했네.'


조금 큰 틀로 일반화와 단순화를 해보겠습니다. 공연의 참가자 넷 중 하나만 안다는 건, 나머지 셋은 모른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의 관객 입장에선 초면인 사람과 음악에 반응을 해야 한다는 사실과도 필연적으로 결부됩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노래에 억지로 반응하길 바라는 건, 유토피아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유권자가 당론에 적극 동의하는 명예의원이 되길 바라는 것만큼 이뤄내기 버거운 일일 겁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설명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대에 올라간 나에 대한 모든 것이 낯선 이들에게 가장 빨리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당연히, 그런 나를 솔직하게 소개하는 것이라고- 적어도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단순히 연혁을 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이 곡이 무언지, 어느 부분을 따라 할 수 있는지.. 약간의 정보를 던져주는 감각이 있는 무대 위 사람들에게 관객들은 동화될 준비를 마칩니다. 단순히 기타와 베이스, 드럼과 건반 소리, 그에 더해지는 목소리만을 듣는 게 아니라 그들의 음악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변하는 모습을 관객석에서 겪고 있노라면 약간의 전율까지 돌기도 합니다.(이게 제가 딕펑스, 피싱걸스, 모트, 불가마 싸운드의 아티스트 등을 좋아하는 이유 중 큰 축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로열 팬을 무시하지 않는 선에서 새로운 팬에게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는 능력이 다들 출중하다 생각해서.)


다만 이는 생각보다 꽤나 간과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제가 보게 되었던 한 밴드는 무대에 올라온 이후, 본인들의 이름만 한 번 말하고 30분 동안 곡 제목마저도 전달하지 않은 채 메들리로 본인들의 곡을 부르더니, 공연 막바지가 되어서야 음원 사이트의 본인들의 이름을 검색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무대를 정리하고 내려갔습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곡들의 멜로디, 그리고 간혹 가다 들리는 가사는 마음에 들었던 기억도 납니다만 저는 절대 이들의 곡을 듣지 않겠다 다짐했습니다. 관객 입장에서 그 호응하지 못할 30분의 기억은 너무도 괴로웠고, 이방인이 된 기억은 불편했으며, 억지로 친 박수는 손바닥만 아파오게 했습니다.

그렇게 불만스럽던 공연의 끝 맛은 썩 쉽게 지워지지 않아 침대에 누워서까지도 골똘히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한 개의 곡을 줄이더라도 자기들이 누군지 전달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을까. 조금이라도 많은 곡을 들려주고 싶은 건 알지만 전달이 제대로 안 된 것 같아. 요즘은 단순히 음악이 좋다고 해서 사람들이 찾아 듣는 걸 기대하기는 힘들 텐데. 냉정하게 말해서 좀 로망이지.

작은 투정은 어느덧 작지 않은 불평으로 변이되어 있었고, 생각이 꼬리를 물고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향하기 직전, 저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결론에 닿았습니다.


근데 나는,

뭐가 달랐었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참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쉬이 고쳐지지 않는 소극적인 성격은 모든 곳에서 약점으로 꼽혔기에- 매번 모르는 이들에게 나를 새로이 내보이면서도 언제나 남들보다 적응이 조금 느린 나를 적응시키는 건 민폐요, 항상 반대급부로 내 치부를 드러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불편한 어딘가에서는 '진짜 나'를 내세우기는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샌가부터 제가 편한 사람과 편한 공간에 있기 위해 나만의 바운더리를 만들어내는 데에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아주 정말 조금씩 넓혀가긴 했지만 모든 것이 결국 한정적인 곳에 갇히려는 행동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 안에선 저는 거리낄 것 없이 편안하게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허나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편안함은 무례함으로 오인될 수 있었고, 소심성과 함께 가려버린 것은 조심성이었습니다. 억지로 만든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규칙은 오로지 그 공간에 맞는 억지스러움이었을 뿐입니다. 목적이 불분명한 거부감은 반대로만 저를 이끌었고, 그저 소심함이 싫었던 저는 과장되게 행동할 수밖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어색함을 불러오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진짜 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낯선 이에겐 이방인으로 익숙한 이에겐 부자연스러운 사람으로 남게 될 것 같습니다.

결국 저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가장 답답한 것은 저 또한 이를 이미 인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든 이를 해소해보기 위해서 열심히 저를 팔아보려고 해 봤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열등감을 창으로, 우울함을 방패로 내세우는 고슴도치로 전락해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뿐만이 아닌 저조차도 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무대에 올라간 누군가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지적을 하려 하다니. 아이러니하다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남을 향해 대차게 뻗은 삿대질은 언제나 쉬웠지만 그 밑에는 저를 향해 접힌 손가락들이 있었고, 앉은뱅이로 살며 절름발이를 욕했으며, 제가 가장 싫어하는 모습의 실루엣은 이미 제가 아니면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약간 어설프다고 생각되는 모습에서, 저를 봤던 것 같습니다. 본디 저는 가장 저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 저 같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제 자신에게 가장 냉정한 시선을 들이대고 강한 비판과 비난을 하려 노력했습니다. 허나 이제 시선과 반대로 느슨해진 행동에 조여 오는 마음이 그 압박감을 더는 스스로 견디지 못해 몰래 타깃을 바꿔본 걸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 인생이 무대라면 저는 마이크도 잊고 올라간, 꽤나 출중한 천치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머리가 꽤나 복잡해졌습니다. 그냥 빠르게 잠에 들고 싶어져서,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알코올적 거리두기라는 저렴한 표어와 함께 베란다로 밀어뒀던 진 한 병을 가져와 토닉 워터와 가볍게 섞어줍니다. 여유로운 척 한 모금을 홀짝 마시고 고개를 숙여 다시 진의 병을 바라보자, 맥주병을 들고 있던 그 친구가 이어서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근데 관객이 좀 없더라도,
어쨌거나 남아서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꽤 행복한 일 아니냐.


물끄러미, 그리고 한 번 더 물끄러미.


그러고 나서야 겨우 잔을 비워봅니다.

오늘따라 조금 더 어지러워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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