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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청 May 26. 2019

코카서스 3국 여행기13

조지아 정교회의 성지 므츠헤타

 룸스호텔에서의 럭셔리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2시쯤 돼서 예약한 택시가 도착했다.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가는 길도 왔던 길인 조지아 군사도로다. 이 도로는 길이 212㎢로 수도 트빌리시에서 대코카서스 산맥을 가로질러 러시아 국경 마을 블라디카프카즈까지 나 있는 군사용으로 러시아에서 만든 도로이다. 원래 산악길로 대상들이 사용하던 험한 도로였는데, 러시아에서 1783년에 말 8필이 수레를 끌 수 있는 정도의 길을 완성했고, 1863년에 현재의 도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스탈린이 독일 포로들로 하여금 엄동설한에 이 도로를 개선, 보수하도록 했다고도 한다.

 1시간 정도 달려서 조지아-러시아 우정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언덕길에 도착했다. 안개에 휩싸여 있는 언덕 끝에 위치한 파노라마 조형물은 스테인드글라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언덕 너머는 급격한 경사면이었다. 아득하게 보이는 계곡에는 하얀 실을 풀어놓은 것 같은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중간에 둥그런 호수를 만들어 놓았는데, 마치 에메랄드 보석을 박아 놓은 것 같았다.

 다시 1시간을 넘게 달려 차는 므츠헤타에 도착했다. 터키의 카스 지역을 원류로 해서 카스피해로 빠져나가는 1,515㎢의 장강인 므츠바리 강은 트빌리시에 당도하기 전에 코카서스 산맥에서 흘러온 아그라비 강과 합류하는데, 그 두물머리 언저리에 위치한 므츠헤타는 조지아 정교회의 성지로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5세기에 트빌리시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는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마을 입구 쪽에는 4세기에 건설된 삼타브로 수도원이 위치하고 있다. 수도원 구경을 마치고 수도원 입구에 있는 화장실에 단체로 몰려갔는데, 마침 화장실 앞에서 사용료를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여기는 화장실 사용료를 받지 않나 하고 의아해할 때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났다. 딸이 6명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출발을 위해 차를 타려고 하는 순간 그 할머니가 쫓아왔다. 뭔가 착각을 한 듯 막무가내로 돈을 더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잠시 동안 통하지도 않는 말로 실랑이를 하다가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마귀할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푼 되지 않는 화장실 사용료는 여행 내내 여러 모로 짜증스럽게 했다.


 삼타브로 수도원 근처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때 입었던 겉옷이 묻혀 있다는 스베티츠호벨리 교회(일명 ‘살아있는 기둥’ 교회)가 있다. 성 니노에 의해 교회가 지어졌고, 현재 형태의 건물은 11세기에 조지아의 건축가인 아르사키스제에 의해서 건축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그루지야 정교회의 주요 교회 역할을 했으며, 군주의 대관식이나 장례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2004년에 건축된 트빌리시의 사메바 대성당에 이어 조지아에서 두 번째로 큰 성당이기도 하다. 조지아 정교회 기록에는 카르틀리의 첫 대주교 이오바네가 335년부터 363년까지 봉직했다고 전해진다. 


 조지아는 로마 가톨릭이 아닌 동방정교를 믿는 나라다. 동방정교란 서방교회, 즉 로마 가톨릭과 구별하기 위해 쓰는 호칭으로, 발칸반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의 중심 종교이다. 동쪽이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한다. 부활절을 이스터(EASTER) 즉 ‘동방의 날’로 부르는 것도 같은 이치다.  200여 년에 걸쳐 태평성대를 누려온 로마제국은 사치향락에 빠져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235년부터 284년 50년 동안 이른바 ‘군인 황제 시대’에는 장군 출신 황제가 18명이나 됐다. 북방의 야만족인 게르만족이 대이동을 시작하면서 로마제국은 위기에 빠졌고, 이런 위기상황에 황제가 된 이가 바로 콘스탄티누스다. 로마제국이 다시 일어서려면 대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이전한다(330년). 이때부터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의 갈등이 시작됐고, 410년 로마제국은 분리가 된다. 동로마제국은 수도 이름을 따서 비잔틴제국으로 불렸고,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족 장군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서로마제국은 멸망했으나 기독교와 그 수장인 교황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오랜 갈등 끝에 1054년 가톨릭 교회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로 분리가 되고 말았다. 

로마 가톨릭 교구는 로마 뿐이었기 때문에 로마가 교회의 중심이자 핵심이고 최고의 권위를 지니게 되어, 전 세계 모든 교구가 로마 교황을 최고의 지도자로 떠받들어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체계가 성립됐다. 성직자 사이에도 신부,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의 위계질서가 엄격한 계급체계로 이루어졌고, 일반 신도들은 평신도라고 하는 제일 낮은 계급에 불과하다. 동방정교는 비잔틴제국의 세력이 워낙 약하고 날로 위태로워지면서 다른 교구를 감독할 능력이 없었던 까닭에 각 교구들은 서로 대등하고 독립된 관계를 유지하며 간섭하지 않았다. 더욱이 터키에게 정복되어 정교가 혹독한 탄압을 받게 된 뒤로는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지도 못했다. 자연히 각 지역에 따라 독자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정교의 각 교구 우두머리인 주교들은 모두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 성직자가 개인적인 권위를 갖지 않아 평신도와 동등한 수평적인 구조였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죄로부터의 해방인 구원을 중시했고, 구원이 실천되는 곳이 바로 교회라고 믿는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스러운 전통을 신앙의 원천으로 보고, 죄를 씻고 축복을 내리는 세례를 중시했으며, 7성사(세례, 견진, 성체, 고백, 혼인, 신품, 병자)야말로 인간에게 구원과 신의 은총을 부여한다고 믿는다. 

동방정교의 핵심은 신앙, 즉 믿음을 몸소 체험하는 것을 중시한다. 신의 세계를 세속과 구별하고 종교를 정치와 분리한 로마 가톨릭과 달리 정교에서는 인간의 세계를 곧 신의 세계로,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지 않는다고 보기에 영육일치, 성속일치, 정교일치를 주장한다. 정교에서는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지는 않으나 결혼한 성직자는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고위 성직자인 주교 등은 독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원보다는 부활을 중시하고, 최대의 축일은 성탄절이 아닌 부활절이다. 종교행사에서 모든 악기 사용이 금지되고, 오로지 사람의 목소리로 부르는 성가만 허용된다. 아이콘을 숭배하는데 아이콘은 ‘모습’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에이콘(EIKON)에서 비롯됐다.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원정은 사실상 침략전쟁이었는데, 십자군들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서 결정적으로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는 원수 관계가 되고 만다. 그때 약탈로 인해 서유럽으로 들어간 아이콘은 서양미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고, 르네상스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스베티츠호벨리 교회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니 건너편 두물머리 벼랑 위에 즈바리 수도원이 고고하고 위엄 있게 므츠헤타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트빌리시 역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가 않았다. 아르메니아 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고 손짓 발짓으로 기사 아저씨와 소통을 했으나 차는 엉뚱하게도 디두베 역으로 가고 말았다. 어렵게 소통을 한 후에 다시 출발을 했는데, 도착해보니  이번에는 너무나 익숙한 자유 광장이었다. 언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기차표까지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을 하니 그때서야 기사 아저씨는 제대로 알았다는 듯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18시가 넘은 거리는 퇴근길 정체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교통 체증에 짜증이 나고, 제대로 가는 건지 의심을 풀지 못하는 불안한 시간이 30분이 지나서 드디어  트빌리시 역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기도 애매해서 역 근처에서 사 온 빵, 과일, 옥수수로 대충 저녁을 때웠다. 기다리기가 지루했는지 가장님은 딸에게 배운 구글 번역기 사용법을 옆에 앉은 아저씨에게 시험을 하고 있었다. 한국말로 입력을 하고 조지아어로 변환을 해서 아저씨에게 들려줬으나 도통 이해를 하지 못했다. 몇 번을 시도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옆 사람들의 귀띔으로 그 원인을 알게 됐다. 그 아저씨는 조지아인이 아니라 아제르바이잔인이었다.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는 같은 나라로 존재했던 역사가 긴 데도 불구하고 언어가 서로 달랐다. 종교도 달라서 2016년에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22시 10분에 기차가 출발했다. 사과, 자두, 옥수수, 빵 등을 안주 삼아 간단하게 맥주를 한잔하고,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잠결에 기척이 있어 깨어보니 차장 아주머니가 여권을 준비하라고 했다. 출국심사가 시작된 것이다. 잠깐의 확인 절차를 거치고 기차는 다시 출발했다. 1시간 정도 가더니 어김없이 다시 정차했다. 입국심사다. 비자를 가지고 밖으로 나오라고 해서 아제르바이잔 비자를 들고 가차 밖으로 나가니 10여 명의 여행객이 몰려 있었다. 여권 뭉치를 든 검사관이 내 여권을 보더니 코리아는 들어가라고 했다. 뒤따라오던 딸이 한국인은 무비자라고 설명을 해줬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누워있으니 군인 한 명이 들어와서 여권을 검사하고 위아래로 훑어보고 나갔다. 이제는 끝났나 하고 자려고 했더니 또 노크소리가 들렸다. 이동용 컴퓨터를 든 군복 입은 검사관이  들어왔다. 성명, 여행 목적, 호텔 이름 등을 물어보고 몇 가지를 컴퓨터에 입력하더니 ‘웰컴’하고 웃는다. 01시 15분,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비몽사몽간에 누군가 깨우는 소리에 잠을 깼다. 가장님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가 먼저 일어나서 가장님을 깨우는데 이런 경우는 지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벌써 06시 30분이라고 했다. 조금 후에 차장 아주머니가 침대 시트를 걷어 갔다. 화장실이 부실해서 세수는 포기하고 수건에 물을 묻혀 대충 닦았다. 여행 일주일 만에 거지꼴이 다 됐다. 역에 기차가 정차하고 여행객들이 내렸다. 아르메니아 역이 맞는지, 아무래도 한 나라의 수도에 있는 중앙역이라기에는 너무 시골스러워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차장 아주머니의 아르메니아라는 말에 허둥지둥 짐을 챙겨 열차에서 내렸다. 07시 21분, 도착 예정시간보다 4분 빨리 아르메니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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