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재자의 고향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겨 09시 40분쯤 체크아웃을 했다. 가방은 호텔에 잠시 맡겨 놓고 온천욕을 하려고 근처 호텔을 찾아갔다. 바쿠리아니 산맥을 끼고 므츠바리 강이 흐르는 보르조미 계곡 아래 산세가 완만해지는 분지에 자릴 잡은 이 도시는 한때 ‘코카서스의 진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제정 러시아 때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휴양도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온천과 광천수가 유명하다. 40여 개 나라에 수출되고 있는 광천수 ‘보르조미’는 조지아의 3대 수출 품목 중의 하나로 소련이 해체되기 전인 1980년대에는 해마다 4억 병씩 수출이 됐다. 그런 광천수를 활용한 온천은 앙드레 지드나 푸시킨 같은 세계적인 대문호들이 극찬할 만큼 수질이 뛰어나 이곳에서의 온천욕은 일생에 한 번은 꼭 경험해봐야 할 버킷리스트로 손꼽히고 있다.
외관도 화려하고 규모도 꽤 큰 럭셔리한 호텔로 들어가니 내부도 휘황찬란했다. 입구에 건장한 남자가 위압적으로 서 있었다. 프런트 직원의 안내를 받아 지하로 내려가니 온천 시설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우리가 예상했던 대중목욕탕이 아니라 호텔식 고급사우나 느낌이었다. 놀라운 건 입장료였다. 1인당 60라리, 4명이면 10만 원이 넘는 액수였다. 일생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보르조미 광천수 온천욕인데 다소 비싸도 할 것인지, 그 돈으로 다른 걸 할 것인지 고민과 논란 끝에 너무 비싸고 시간도 넉넉하지 않으니 아쉽지만 온천욕을 포기하기로 했다. 맡겨 놓은 여권을 찾아 호텔을 나오는데 뒤통수가 몹시도 따가웠다.
다시 호텔로 후퇴한 일행들은 방 열쇠를 받아서 화장실 등을 이용하러 객실로 올라갔고, 특별히 할 일이 없는 나는 혼자서 동네 산책에 나섰다. 갓 구운 빵을 배달하는 차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는 도로변 나무 그늘 밑 평상에서는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기 비슷한 걸 두고 있었다. 길옆 하천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건물 앞 공터에는 다 익은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대체로 한산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 같았다. 건물 곳곳에는 매매 표지판이 자주 눈에 띄었고 간혹 폐가도 보였다. 이곳의 전성기도 지난듯했다.
10시 50분경 호텔 로비에서 재정비를 마친 일행들과 만나서 인근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원 입구에는 산꼭대기까지 이어진 케이블카 운행되고 있었다. 티켓을 사서 케이블카에 오르니 곧 쓰러질 듯한 백발의 노인이 운행 안내를 하고 있었다. 저 연세에도 직업을 가지고 소일거리라도 하는 것이 나은 건지, 연금으로 평안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 더 나은 건지 잠시 헷갈렸다. 케이블카가 도착한 산 정상에는 호젓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어젯밤에 내린 비로 약간 축축한 숲속 길은 우리 일행들 말고는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쭉쭉 뻗은 소나무가 숲속의 정취를 더했고, 갖가지 나무들이 내뿜는 청량한 기운에 몸과 마음이 상쾌해졌다. 위쪽으로 올라가니 어디서 발원했는지 제법 많은 수량의 물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과 뜬금없는 놀이기구도 보였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숲속 오솔길을 걸어서 하산했다.
호텔로 돌아와서 주인아주머니에게 고리로 가는 택시를 불러 달라고 부탁을 했다. 잠시 후에 인상 좋고 약간 헐렁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택시를 몰고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택시비로 100라리를 요구했는데, 협상의 대가인 가장님은 말도 통하지 않는데도 오직 보디랭귀지로만 80라리로 깎는 놀라움을 보여주었다. 기사 할아버지는 보기와는 딴판으로 조지아의 다른 운전기사들과 다를 바 없이 거침없이 추월을 반복하며 무섭게 달렸다. 1시간 후에 냉혹한 독재자 스탈린의 고향인 고리에 도착했다.
먼저 스탈린 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입구에는 스탈린 동상이 서 있었다. 스탈린 격하와 소련의 패망을 견딘 몇 개 안 되는 스탈린 동상 중의 하나라고 한다. 박물관 건물 안에도 똑같은 모양의 동상이 있었다. 박물관에는 스탈린의 일대기를 담은 사진들과 편지, 문서들, 집기들, 선물 등이 전시돼 있었다. 박물관 옆에는 스탈린의 이동 집무실 역할을 했던 전용 열차도 전시돼 있었다. 집무실은 의외로 소박했다. 박물관 앞쪽에는 스탈린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스탈린이 구두 수선공인 아버지와 양장점 일꾼이었던 어머니와 살았던 초라하기 짝이 없는 집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건물이 둘러싸고 있었다.
레닌 사후 권력투쟁 끝에 소련의 철권통치자가 된 이오시프 스탈린. 그는 조선인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아픈 상처를 남겼다. 1937년, 극동지방의 조선인 대략 18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이주 직전에 당 간부와 지식인, 전문가 상당수가 즉결재판을 받고 처형됐는데 그 수가 약 2,500명이었다. 처형된 이유는 대개 일본 밀정 혐의였다. 일제로부터 온갖 고문과 탄압을 당해가며 민족해방투쟁을 했던 조선인 혁명가들에게 일본 밀정 혐의는 언어도단이었다. 스탈린 정부로서는 강제이주정책이 일거양득이었으니 어느 쪽에 봉사하는지 의심스러운 국경지대 소수민족을 청소하고 중앙아시아 황무지도 개척하자는 것이었다.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카자흐스탄이 소련에 편입된 것이 1936년이었으니 이 광활한 땅을 소비에트 체제 안에 흡수하는 일도 시급했다. 조선인들은 강제 이주 과정에서 혹한의 추위와 굶주림,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반수가 죽어 나갔다.
스탈린 박물관과 생가 구경을 마치고 떠날 즈음 단체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박물관으로 몰려들었다. 저들은 도대체 왜 여기에 온 것일까? 스탈린 독재의 실상을 보기 위함일까? 아니면 스탈린 시대의 영광이 그리웠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고리라는 작은 마을을 유명하게 만든 독재자에 대한 고마움 때문일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스탈린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리성이 있었다. 돌과 흙으로 쌓아 올린 토성은 한창 보수 공사 중이었다. 성에서는 고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보수 공사 하는 노동자들이 친근하게 동방의 낯선 여행객들을 반겨주었다. 성벽 바로 밑의 평지에는 십자군처럼 보이는 조각상들이 근엄하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16시 20분, 성 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기사 할아버지를 만나 트빌리시로 출발했다.
17시 30분쯤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다. 트빌리시 여행자 거리 중간에 위치한 아담한 호텔이었다. 밀린 빨래를 잽싸게 하고, 호텔을 나와 근처 가계에서 한국에 돌아갈 때 선물로 가져갈 와인과 차차를 샀다. 19시쯤 조지아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근사하게 하기로 하고 여행자 골목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갔다. 스테이크와 와인, 맥주를 시켜서 모처럼 여유롭게 칼질을 하는 호사를 누렸다. 식사가 끝나고 또다시 쇼핑을 하러 가는 여성들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