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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혜 Jul 03. 2020

숨과 숲

애매하게 삽니다 


업이 운동인 A는 언젠가 유산소 운동을 너무 많이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누구나 '정해진 숨'이 있노라고, 그래서 숨을 자꾸 몰아쉬면 그만큼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운동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을 했으므로 나는 가능한 조심스럽게 A의 수명을 물었다. '단명'이나 '요절'과 같은 단어를 지우고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럼 넌 장수하지 못한다는 거야?"  

"아마 그럴걸" 


이따금 의식적으로 숨을 아주 깊게 마시고 뱉는다. 되도록 천천히. A의 말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은 필요성을 느끼고 몇 차례 숨을 깊이 마신다. 그러고 나서야 A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 오래 살아야지.' 

그러나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일상의 공간에서는 숨을 깊게 내쉬는 행위가 썩 편하지만은 않다. 미세먼지 지수를 확인해야 하는 도시에서 나무 몇 그루 있는 공원에 간들 대기질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무가 넉넉하게 자란 숲에 가야 숨이 자유롭다. 

그렇기에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때로 축복으로 여겨진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먼 길 위에서 계절마다 다른 냄새를 맡았다. 매일 걸었으므로 그 냄새들을 기억한다. 깊게 마시고 또 내쉬면 폐부에는 꽃과 나무, 흙, 바람 같은 것이 묻은 공기가 차고 또 빠지는 듯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 여러 번 반복해 읽은 문장들은 당연히도 광릉숲 부분이었다. 숲과 숨의 종성을 떼고 단어 그 자체에 나무를 심고 숨을 불어넣는 김훈의 문장은 대상 장소가 민둥산이었대도 저 스스로 깊고 푸르렀다. 


'내 몽상 속에서 숲은 대지 위로 펼쳐놓은 숨의 바다이고 숨이 닿는 자리마다 숲은 일어선다. 숲의 피읖 받침은 외향성이고, '숨'의 미음 받침은 내향성이다. 그래서 숲은 우거져서 펼쳐지고 숨은 몸 안으로 스미는데 숨이 숲을 빨아 당길 때 나무의 숨과 사람의 숨은 포개진다. 몸속이 숲이고 숲이 숨인것이서 '숲'과 '숨'은 동일한 발생 근거를 갖는다는 나의 몽상은 어학적으로 어떨지는 몰라도 인체생리학적으로는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몸이 입증하는 것들을 논리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 있을 만큼 명석하지 못하다.'

김훈, <자전거여행> 중





© the Jane Goodall Institute



"I completely happy when I'm alone in nature.

I love to be alone in nature. It makes me happy."


탄자니아 곰베 숲에 홀로 앉아 있는 젊은 제인을 상상해본다.  슬그머니 제인 옆에 자리를 잡고 제인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침팬지도. 지구 상에서 침팬지와 가장 소통이 자유로운 인간이자 침팬지를 사랑하는 마음 이상으로 그 모든 숲을, 자연을, 지구를 사랑하는 동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제인 구달. 그녀는 '숲 안의 인간'을 떠올릴 때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다. 하물며 이름마저 제인이다. 


내 나이적 제인은 지성미가 물씬 풍기는 늘씬한 금발의 미인이었다. 한때 그의 남편이었던 휴고가 남긴 1960년대 내셔널 지오그라피의 사진과 영상에서 제인은 배우처럼 아름다웠다. 대중이 바라보는 백인 미녀와 아프리카의 숲, 침팬지가 어우러진 풍경이 판타지나 다름없는 프레임에 걸려 있었다면 제인, 그 안의 삶은 진실로 엄숙하고 고요했던 것 같다. 

그는 50년이 넘는 시간을 곰베 숲 안에서 천천히 호흡해왔다.  그는 또한 과거나 지금이나 단호하고 명료한 과학자의 표정과 품위를 잃은 적이 없다. 자연 안에 혼자 있을 때 행복하다고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 나까지도 행복해진다. 


내게 숲은 경이롭고도 두려운 공간이어서 나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홀로 숲을 만끽하지 못한다. 그래서 제주의 곶자왈에 들어설 때마다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그 속을 잠시 헤맸을 적 기억은 두려움 그 이상의 공포였다. 

그러니 그토록 울창한 탄자니아 곰베숲 안에 홀로 앉아 행복의 충만함을 만끽해온 제인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의식적으로 숨을 깊이 쉬고 뱉었던 곳은 경주 삼릉 숲이다.  강릉의 솔숲도 좋지만 나는 경주의 솔숲을 조금 더 편애한다. 해송은 바다에 묻히고 선교장이나 솔향수목원의 소나무들은 그 자체로 말쑥하거나 장엄해서 그 앞에 서면 다소 위축되는 느낌마저 든다.  반면 경주의 솔숲들은 일단 숲 안으로 들어서야 여기가 솔숲이구나 싶은데 각각의 소나무들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자유분방한 느낌을 주면서도 군락 전체를 보면 능을 비호하는 듯 겸손해 보인다.  사진동호회로 붐비는 개나리 시즌의 아침 삼릉숲을 제외하면 삼릉을 감싼 솔숲은 언제나 아늑하고 편안하다. 사람들이 덜 드나드는 효공왕릉과 선덕여왕릉 주변의 솔숲도 좋다. 솔숲에서의 솔숨은 청량하고 그윽하다. 




이상 2017년에 썼던 글을 조금 다듬었다. 마스크 착용 의무화가 된 요즘은 깊은 숨은커녕 마스크 없이 숨만 쉬어도 좋겠지만 그래서 숲을 더 갈구하게 된다. 보름 전쯤 인적 드문 전나무숲에 들어가 오랜만에 심호흡을 했다. 숨을 저장해 놓는 사람 마냥 다른 때보다 더 의식적으로 숨을 마시고 내쉬었다. 달고 시원했다. 

물을 사 마시는 세상이 올 거라 생각지 못했던 과거가 있었듯 공기를 사 마시는 세상이 머잖아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재(人災) 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흔히 인간의 탐욕이 부른 재앙이라고, 원인은 아주 명쾌하게 정리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째서 절대다수가 근시안적 사고로 탐욕을 부렸고 또 부리고 있나. 그것은 거대한 하나의 흐름일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저마다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서'.  그러다 그 흐름에 균열이 가고 균형이 깨지면 인류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현시점처럼.


숨 쉬고 사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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