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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Feb 02. 2022

나를 전율시킨 영화 장면 열 가지

장르 불문 좋아하는 영화 명장면 꼽아보기

  취향이란 뭘까?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 책을 떠올려도 나의 취향을 무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규칙 같은 게 없다. 나는 그냥 본 것을 또 보고, 듣던 것을 또 듣고, 먹던 것을 또 먹는다. 질릴 때까지 그렇게 한다. 질리도록 다시 찾게 되는 것들을 결국은 좋아하게 된다.


  요즘은 사람들이 일부러 독특한 취향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남다른 취향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 비해 내 취향은 그다지 특별하지도, 독특하지도 않다. 누구나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자기 엄마를 좋아하듯 나도 내 엄마를 그렇게나 좋아하고, 누구나 파란 하늘 아래 넓게 부는 바람을 맞으면 기분 좋아지듯 쾌청한 날씨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지극히 평범한 내게 기상천외한 볼거리로 가득한 영화는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상, 겪어본 적 없는 시대 속 인물들이 사소한 감정 때문에 울고, 웃고, 죽고 사는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펼쳐다. 어려서부터 보아 온 영화만 수백 편에 이른다. 남의 사연에 같이 울고, 남의 기쁨에 같이 웃을 때마다 슬그머니 피어오른 생각은 나도 저들처럼 특별한 인생을 살고 싶다는 거였다. 현실을 잊게 할 만큼 몰입하게 했던 힘이 큰 영화 장면 열 가지를 꼽아본다. 순서는 순위와 상관이 없다.




1. 샘 멘데스의 <1917> - 혼신을 다한 달음박질

퇴각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최전방까지 뛰어온 스코필드

  생소한 배우가 등장해서 한참을 '언제 주인공이 나오지?' 하며 기다렸더니 사실 주인공은 첫 장면부터 결말까지 빠지는 씬이 없이 등장하고 있었다. 어느샌가 존재감이 커져버린 주인공 스코필드는 화면 정중앙에서 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최전방의 전투지, 등 뒤에서 터지는 요란한 포격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들을 향해 출격하는 전우들 사이를 가로질러 달려오는 스코필드. 그는 부상을 입고, 동료를, 총을, 군모를, 군장을 차례로 잃고 혈혈단신이 되어 마침내는 오로지 두 발로 뛰어온 전령이었다.

  뒤이어 소개할 영화들 마찬가지로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사운드 트랙, 곧 영화에 삽입된 음악이 굉장히 아름답다. 서사만으로도 충분히 몰입시킬 만큼 흡인력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음악이 대단히 한몫을 하여 몰입한 사람들로 하여금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느끼게 한다.

  강렬한 서스펜스로 뇌리에 박힌 서사와 토머스 뉴먼의 사운드 트랙, 그리고 스코필드 역의 조지 맥케이가 선사한 '생즉사 사즉생'의 희열을 주는 장면이었다.




2.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 고글에 가린 눈부신 용모

공중전 도중 추락한 전투기 안에서 탈출하려 애쓰는 콜린스

  역대 영화 등장신 중 하나이다. 공중전을 벌이던 영국군의 전투기가 바다 한가운데 추락한다. 전투기 안으로 물이 새어 들어와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 이 영국군은 너무 잘생겨버리고 말았다. 영화에서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은 등장인물임에도 이 분이 파일럿용 고글을 벗는 순간 다짐 아닌 다짐을 하고야 만다.

  '영화 끝나고 저 인간 누군지 내가 검색해서 꼭 알아내고 만다.'

  물론 이 영화 외의 필모에는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고글에 가렸다가 드러난 금발에 푸른 눈,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큰 임팩트를 줬을 뿐, 잘생긴 배우들은 이미 차고 넘치지 않는가? 가벼운 눈요깃거리의 영화가 아님에도 콜린스(잭 로던)의 바람직한 푸른 제복 차림과 살짝 젖은 금발머리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첫인상이란 그런 법인가 보다.




3.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 눈동자에 담긴 긴박감

발록을 상대한 후 무너진 다리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간달프

  "Fly, you fools! (도망쳐, 이 바보들아!)"

  마지막까지 맨 뒤에서 호빗들을 지켜준 회색의 간달프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이 한 마디 대사와 장면은 알 사람은 다 아는 명장면, 명대사이다. 긴 설명은 생략한다.

  반지의 제왕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무조건 간달프이다. 죽음의 위기 앞에 두려움과 의연함이 공존하는 이안 맥켈런의 표현력에 오랫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겁에 질려 흔들리는 눈동자, 그 순간에도 발휘하는 유머와 따뜻함, 단호함의 힘이 한데 뭉친 간달프의 결정체 같은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빼놓고 <반지의 제왕>을 논하기란 어렵다.




4.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나를 찾아줘서 고마워!

유바바에게 돌아가던 도중 자기 이름을 되찾고 각성하는 하쿠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미남 캐릭터로 하는 이상형 월드컵이 돌아다니던데, 내 맘 속 일등은 단연 하쿠다. 용감하고 자신 있고 당당한 데다가 단발머리가 잘 어울린다. 여자도 어울리기 어렵다는 그 단발머리가 어울리면 말 다했지(그러고 보니 하울도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미남 캐릭터인데 이름도 비슷하다. 혹시 하쿠와 하울은 지브리 세계관 속 최고 미남?).

  용으로 변신한 하쿠를 타고 유바바의 온천으로 돌아가던 치히로 잊었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린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치히로를 살려준 하쿠를 기억해낸 덕분에 하쿠는 본래 자기 이름을 되찾게 된다. 잊었던 자기 정체를 깨달은 하쿠의 눈이 놀라서 크게 커지고 몸에 붙은 비늘이 낱낱이 떨어져 나가 흩날린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쿠와 치히로가 서로 손을 맞잡고 기뻐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내 어린 시절에도 왠지 하쿠와 같은 친구가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을 일으킨다.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 영원보다 긴 시간으로 남아있을 것만 같아 설렌다.




5. 조 라이트의 <오만과 편견> - 손끝까지 저릿하게 전해오는 이 감정...

엘리자베스의 손을 처음 잡아보고 절로 찌릿한 손을 쭉 펴보는 다아시

  로맨스의 고전이자 원조격인 제인 오스틴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오만과 편견>은 소설만큼 잘 만들었다. 처음 다아시 역을 맡은 배우 얼굴을 보고 조금 실망했으나 영화가 이어질수록 나 역시 다아시에게 미친 듯이 설레고 빠져들게 되었다. 고집스럽게 앙다문 입술로 툭하면 엘리자베스의 심기를 거스르더니 그게 실은 엘리자베스에게 너무 빨리 빠져드는 마음을 제어하기 위함이었다니, 세상에 마상에!

  그처럼 딱딱하게 대하는 남자도 처음이었던 엘리자베스는 마차에 올라타는 자신을 에스코트 해준 이가 다아시였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라고 만다. 당연히 맘 넓은 빙글리 씨겠거니 짐작하고 손 잡아준 사람을 확인하자 무뚝뚝한 얼굴을 한 다아시였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는 엘리자베스와 아무렇지 않은 척 배웅하고 바로 뒤돌아선 다아시. 그러나 속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던 순간의 긴장이 가시지 않는 듯 남몰래 손을 푼다.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을 때, 애가 탈 때의 뜨거운 긴장을 잘 아는 사람이 만든 매우 모범적인 로맨스의 한 장면이었다. 도무지 나무랄 데가 없다.




6. 데이미언 셔젤의 <위플래쉬> - 지독한 인간 덕분에 환골탈태하는 순간

온 관객 앞에서 망신을 준 플래처를 노려보며 멋대로 연주를 시작한 앤드류

  누가 더 독한가 두고 보자! 이를 아득바득 갈며 플래처를 노려보는 앤드류의 패기에 피가 솟구치는 격렬한 쾌감에 휩싸다. 과연 미치려면 제대로 미쳐야 한다. 앤드류는 원래부터 악바리였다. 손바닥이 다 터지고 피가 흘러도 연습을 멈추지 않았고, 지가 좋다고 해서 사귀게 된 예쁜 여자 친구도 앞날에 방해가 된다며 차 버렸다. 원래부터 드럼에 정신이 나간 친구가 끝내는 드럼에 미쳐버렸다. 플래처도 그가 얼마나 악바리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더 미칠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위플래쉬>는 음악에 미친 천재 드러머가 어떻게 성공하는지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사람이 뭔가에 미쳤을 때, 극한에까지 갔을 때의 희열과 쾌감이 얼마나 짜릿한지 느끼게 해 준다. 그러니까 야심이 없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준달까? 나도 앤드류처럼 뭔가에 미쳐서 정신 빠진 짓거리를 해보고 싶어 진다.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해주는 앤드류의 미친 드럼 폭격, 위플래쉬!




7.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 - 어쩌면 영원히 까딱였을 시계 초침

시계 초침의 움직임이 수상함을 깨닫고 놀란 머피

  암울한 미래, 웜홀, 블랙홀, 골디락스 행성, 중력, 방정식 그런 어렵고도 낯선 것들의 총합을 문과가 가장 이해하기 쉬운 감성으로 이해시키는 한 장면이었다. 지금까지 뭔 소리인지 하나도 이해 못 했겠지만, 한 마디로 이 모든 일이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된 거라고 하니 단번에 감동이 물 밀려들어 왔다.

  지구 종말을 목전에 두고 자포자기한 채로 살아가는 오빠 톰과의 갈등과 반목 끝에 머피는 지금껏 부재해온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평생 함께였음을 깨닫고 톰을 껴안는다. 단지 살 구멍을 찾아서 기뻤던 게 아니었다. 그들이 깨달을 때까지 쿠퍼의 사랑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시곗바늘을 움직였을 것이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한스 짐머의 음악 또한 신비로움과 감동을 극대화시켜준다.




8. 왕가위의 <중경삼림> - 한여름, 한낮, 한순간의 짧은 낮잠 같은 젊음, 청춘, 사랑

긴장이 풀려 잠든 페이 옆에 기대어 함께 잠을 청한 경찰 663

  어딘가 서글픈데 어딘가 카리스마 있는 눈빛으로 경찰 663(양조위)이 다가온다. 무심히 샐러드를 주문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가 아니라 일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자연스럽다. 눈빛, 태도, 분위기로 사람 맘을 참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그의 등장만으로도 영화가 너무 재밌다.

  페이의 매력은 또 어떠한가? 짧게 자른 머리에 하얗고 긴 팔다리, 딱 붙는 티셔츠에 부각된 마르고 길쭉한 몸매는 통통 튀는 성격과 너무 잘 어울린다.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대충 주문을 받는 건들거림은 마냥 개성이 넘친다.

  외간 남자의 집에 몰래 드나드는 설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 밖이지만, 이 장면에서 모든 걸 납득하고 만다. 우리가 기억하는 젊음이란, 청춘이란, 뜨겁고도 가벼운 사랑이란 이런 것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내 속을 다 헤집어놓고 가는 것, 한여름처럼, 한낮의 더위처럼 뜨거운 것, 낮잠보다 짧고 달콤한 것, 그런 것들 말이다.

  왕페이가 부른 엔딩 크레딧 곡의 제목은 '몽중인(夢中人)'이다. 꿈속의 사랑을 동경해본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신비롭게 사무치는 이 먹먹한 감정을 이해 못 할 리 없다.




9. 요아킴 뢰닝 & 에스펜 잔드베르크의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세상 모든 진귀한 보물보다 값진 것

카리나가 바르보사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보고 자기 아버지였음을 깨닫게 되는 장면

  기가 막힌 등장신이 있다면 충격과 여운을 안겨주는 퇴장 신도 존재한다. 가장 유명한 퇴장 신은 아마도 <터미네이터>의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엄지를 세우고 "I'll be back."이라 말하는 장면일 것이다.

  캐리비안의 해적이 오랜 세월에 걸쳐 다섯 편이 차례로 개봉되는 동안 감초 역할 톡톡히 했던 바르보사가 이토록 멋지게 퇴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꾸 나타나 잭 스패로우를 방해해서 얄밉기만 했던 캐릭터를 단숨에 탈바꿈시켰던 퇴장 신이었다.

  영화 속 멋진 아버지 역 베스트 5순위 안에 들 법도 하다. <테이큰>의 리암 니슨, <인터스텔라>의 매튜 맥커너히, <아이엠 샘>의 숀 펜, <인생은 아름다워>의 로베르토 베니니, 그리고 <캐리비안의 해적 5>의 제프리 러쉬라고나 할까?

  한평생 잭 스패로우와 경쟁하며 세계의 값진 보물을 찾아 헤맨 바르보사는 "당신에게 나는 뭐죠?"라고 묻는 카리나에게 대답한다. "Treasure!(보물)" 그는 살라자르에게 발목이 잡힌 카리나를 살리기 위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포효하는 바다로 뛰어든다. 바르보사가 인생을 내건 보물은 그의 딸, 카리나였다.




10.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 소년을 영원히 소년일 수 있게 해 준 소녀

캘시퍼와 계약하던 과거의 하울에게 찾아가겠다고 약속하는 소피

  마지막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지브리의 잘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아름다움은 젊음인가, 미남자인가? 그러나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아름다움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존재할까?

  소피는 자신을 잃고 방황하는 어린 하울에게 "널 찾아갈게. 기다리고 있어!"하고 크게 외친다. 소피는 단지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해 사랑하지 않았다. 소피는 누구보다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순수한 소녀의 마음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소피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 순수한 마음이 모든 걸 변화시켰다. 전쟁을 종식시켰고 패배감에 젖은 하울의 상처 입은 마음을 고쳐주었다. 젊음을 탐내는 노인의 사악함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순수함이 가진 강인함을 우리 모두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미야자키 하야오가 외쳤다.

  "널 찾아갈게. 기다려 줘!"

  우리 모두 소년이었던, 소녀였던 그때를 되찾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순수함에 있다는 걸 모두가 깨닫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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